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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물들도 모성(母性)은 애절하고 강한데..

이상호 | 입력 : 2019/05/31 [08:5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은 짐승들과도 친해지며 짐승들과 교감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지 않고 짐승을 기르지 않는 사람은 농민으로 산다기보다는 그냥 농촌에 사는 전원주택 족이겠지요.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최소한 닭 몇 마리 아니면 토끼 몇 마리라도 기릅니다. 농촌 농부 시인 유승도의 산문시 <배는 고프고 울음은 나오고>를 읽었습니다. 시간적 배경이 겨울이지만 지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배는 고프고 울음은 나오고

    

처음 임신을 한 흑염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덜 자란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어서지도 못하더니 죽었다. 호두나무 아래 묻어주고 우리로 가봤더니, 어미 흑염소는 새끼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자세다. 하늘이 무너져라 울어대는 놈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같이 울 생각은 없으니 콩깍지나 넉넉히 갖다 줄밖에

 

<유승도, 『수컷의 속성』 , 시와 에세이>

    

정말 유승도(1960~ ) 시인은 산골 시인입니다. 원래 서천이 고향인 그는 경기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문예중앙> 신인 문학상에 “나의 새”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20년 전 강원도 영월의 해발 600m 만경대 산자락에서 토종벌을 키우고 포도, 두릅, 감자 등을 심어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답니다. 그의 집에는 염소와 강아지 닭 등 각종 짐승도 있답니다. 특히 그의 시에는 염소 이야기가 많습니다.

    

염소가 초산에 조산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조산아인 새끼 염소는 죽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어미 염소는 새끼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도록 우는 것을 보면, 자식을 잃은 어미의 간절한 호소는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사람보다 더 애절한 것 같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도 무너집니다.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먹이만 넉넉히 줍니다. 강한 모성애를 본 것입니다.

    

참으로 오래된,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소 장사를 하셨습니다. 농사라 해봐야 식구들 식량 할 정도였으니, 가족들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려면 뭔가 벌이를 해야 하셨겠지요. 소 장사를 오랫동안 다니셨기에 중개사 자격이 있어 거의 매일 우시장을 돌면서 소를 사다가 팔기도 하고 소를 중개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새끼 밴 소를 사다가 잘 길러 새끼를 낳으면 새끼나 어미를 팔기도 했고 어떤 때는 둘 다 팔기도 했습니다. 새끼 밴 소를 사 오셨을 때는 참 오래 키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미 소를 집에 떼어 놓고 새끼를 팔거나, 새끼를 떼어놓고 어미 소를 팔 때면 한참 동안 집안은 소 울음소리로 매우 시끄럽습니다. 송아지를 먼저 팔았을 때는 어미 소가 새끼를 부르는 소리로 시끄러웠고, 어미 소를 먼저 팔았을 때는 송아지가 어미 소를 부르는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서로를 찾는 그 애절함은 차마 말 못 할 정도였습니다. 먹이도 제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그 애절한 울음은 적어도 일주일은 갔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목도 쉬고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잠해집니다. 아마 지쳐서 찾기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초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또 새끼 밴 소를 사 오셨습니다. 그리고 약 보름간 마구간에서 정성껏 키우셨습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셔서 소죽을 끓이셨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다소 추운 겨울밤 눈이 조금 내렸는데 한밤중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끼 밴 어미 소가 한밤중에 엄매 엄매애...비명을 질렀습니다. 그 비명은 처절한 고통의 비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밤중에 호야 등을 켜고 외양간에 가서 출산하는 어미 소를 여러모로 돌봤습니다. 어머니는 가마솥에 물을 끓였습니다. 나는 곁에서 호야 등을 들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심한 밤에 온 식구들은 외양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어미 소가 새끼를 낳을 때 드러누워 눈물을 흘리고 침을 흘리면서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내 어머니도 나를 낳을 때 저토록 고통스러웠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잠자던 나의 의식을 깨워준 출산의 고통에 대한 강한 이해였습니다. 그렇게 출산의 고통 신음을 지속하는 중에 아버지는 갑자기 손으로 어미의 몸에서 조금 나온 새끼를 잡아당겨 꺼내었다. 그리고는 “쯔쯔..쯔쯔쯔...” 하고 혀를 차시더니 한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새끼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미동도 없었습니다. 사산(死産)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어미 소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외양간을 나가시더니 담배 한 개를 물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한숨을 쉬셨습니다. 지금처럼 수의사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던 그때 어미 소는 새끼를 사산했던 것입니다.

    

난 아버지의 그 한숨 소리의 의미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소는 재산이며 생명이었습니다. 그날 죽은 송아지에 대한 아버지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체 처리에 대한 상당한 고심이 엿보였습니다. 소가 사산을 하고 난 날 저녁 아버지는 나에게 얼른 방에 들어가 자라고 강요하셨습니다. 다음날 죽은 송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 아버지가 그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나에게 그 주검을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침울해하시는 아버지에게 송아지의 행방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에게 만삭인 소를 사 올 때 너무 많이 걷게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소 몰이꾼이 채찍질을 가하지 않았나 걱정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것'을 연발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일주일 이상 아버지는 어미 소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새벽부터 끓이는 소죽에도 쌀겨를 듬뿍 넣고 마구간에 짚을 잔뜩 넣어 보온을 해 주셨습니다. 어미 소는 젖이 불어 늘어졌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손으로 짜 주셨습니다. 일어서면 매일 빗질을 하여 털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지극한 소 산후조리 보살핌이었습니다. 어미 소는 하루가 지나지 않아 외쳐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울어대는 어미 소의 울음소리는 저녁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어미 소는 목이 쉬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애절하게 송아지를 찾는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생생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요. 그렇게 열흘가량 지났을까, 어미 소의 울음은 점차 가라앉았습니다. 아버지의 어미 소에 대한 정성 탓이었을까? 새끼에 대한 연민의 포기였을까? 이미 사라진 자식에 대한 어미 소의 애절한 모성은 그렇게 현실로 받아들여 지면서 어미 소의 가슴에 묻어 둔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어머니의 그 위대한 모성이 질식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출산율 0.98이라는 충격적인 숫자는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성성의 본질 속에는 출산이라는 위대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명화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 향상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출산의 고통과 양육의 어려움이 출산을 기피 하게 했습니다. 생존 경쟁 본능이 종족 보존 본능을 이긴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는 출산과 양육을 저해하는 사회적인 지원과 정부 정책의 부재가 도사리고 있지만,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인위적인 거부 현상을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는 것 같은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성 폄하가 아니라 출산과 양육이라는 여성성이란 자연 섭리에 대한 배반 아쉬움입니다.

    

어찌 그뿐인가? 얼마 전엔 의붓아버지와 공모하여 중학생 친딸을 살해하여 유기하도록 방조한 친모가 있었습니다. 살해한 의붓아버지도 그렇지만 그것을 방조한 친모는 인간성을 완전히 버린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기 생명과도 바꾼다는 모성을 버린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자기 향락의 왜곡된 정서가 저지른 시대적 아픔입니다. 요즈음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는 파렴치한 어머니, 자녀를 사랑하기는커녕 방치, 학대하는 어머니에 대한 뉴스를 자주 봅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먹먹해 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인면수심(人面獸心) 즉 사람의 얼굴을 한 짐승이라 합니다. 그런데 새끼를 잃은 어미 소와 흑염소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생각하면 자식을 학대하고 버리는 여자는 어머니가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발전된 시대, 문명화된 시대의 도덕률도 여성성의 신장도 아닙니다. 고귀한 인간성의 ‘버림’입니다. 지극히 병적인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21세기는 분명 문명은 발달하였지만, 인간다움과 인간의 도덕률은 발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짙습니다. 많은 언론과 여성 운동가들도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만큼, 여성성에 대한 숭고한 의미도 새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이 아이를 낳건 낳지 않건 그 모성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 땅에 학대받는 아이, 버려지는 아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친자 살해는 더 없을 것이고요. 사람들이 새끼 잃은 어미 소와 흑염소의 애절한 울음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수 있는 세상이면 더욱 인간다운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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