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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인터체인지》에 버려진 위험한 아이들

이상호 | 입력 : 2019/07/26 [10:2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얼마 전 생후 15개월 된 아이를 굶기고 상습적으로 때려 숨지게 한 보모(김씨 39)에 대해 법원이 대법원의 양형기준보다 높은 징역 17년의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선 형량이 가볍다고 합니다. 김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이를 싸게 돌봐줄 수 있다는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고, 이에 빚을 갚기 위해 맞벌이를 하던 문양의 부모는 아이를 김씨의 집에 데려다주어 돌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생후 15개월 된 아이에게 9일 동안 하루 한 차례만 분유를 먹이고 아이의 머리와 배를 주먹과 발로 수차례 때려 지난해 11월 숨지게 한 사건인데 보모였던 김씨는 2016년 3월과 2018년 10월에도 아이를 학대한 협의가 있었습니다. 정말 아이 맡기기가 무서운 세상입니다. 최근에는 전남 무안군의 한 농로에서 중학생 친딸을 계부가 살해하여 유기하도록 방조한 비정한 엄마의 이야기가 세상을 우울과 분노로 떨게 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가 위험한 세상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이 최후의 보루인 엄마까지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인터체인지》에서 버려지고 있음을 한탄합니다. 박용진의 시 《인터체인지》는 바로 그런 세태를 개탄한 시라 여깁니다.    

    

인터체인지

   -박용진(1982~  ) -

 

볕 잘 드는 마루에서

배부른 엄마가 잠든 애기 볼을 쓸고 있다

밤에는 해가 없다 그러나 달도 없고

 

숨 가쁜 개 한 마리 어슬렁거린다

개나리꽃 노란 봄날 약수터에는

아이를 퍼다 나르는 노인들이 많다

 

따뜻한 남쪽나라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다

누이의 뒤에서 허리를 껴안는 소년과

그들을 둘러싼 커다란 벚나무들

또 낮은 길다

 

간이 목마는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덤프트럭이 눈길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진다

찌그덕 찌그덕 목마에 실린 아이들

건조한 허공에서 웃는다

 

내 이마에는 고양이 손톱이 깊게 박혀 있다

애기 목 먹고 애기 울음 우는 고양이들

함정처럼 뻥뻥 뚫린 하수구에 사자가 산다

고양이들을 낳고 있다

 

할머니는 나를 비닐 속으로 집어넣는다

내 목소리는 점점 변해간다

나는 끊임없이 늘어지고

나는 눈 속에서 구렁이를 밟았다

    

  - 박용진 『미궁』(파란)-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중요성을 가장 외치는 시대에 생명경시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의 생명마저 위험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위태로워지는 것인데 어른들은 현재의 자기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이 시인의 렌즈에 잡혔습니다. 아이를 학대하고 때려 숨지게 한 보모의 사건에서 언급했듯이 세상은 아이들에게 위험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태어나서도 엄마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엄마 아빠들에게 살해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만약 태어나는 아이에게 탄생의 자유의지가 있다면, 탄생하고 싶지 않은 아이가 많을 것입니다.

    

이 시는 난해합니다. 시의 소통망을 체계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장면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산발적으로 출현하고 겹쳐집니다. 마치 깨어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듯이 일상적인 삶의 가치와 논리는 해체되어 버립니다. <볕 잘 드는 마루> <배부른 엄마> <잠든 애기>와 같은 밝고 희망찬 분위기와 <해가 없다. 달도 없고> <숨 가쁜 개> <기록적인 폭설> <애기 목을 먹고 우는 고양이> 등 매우 어둡고 위험한 분위기가 겹쳐집니다. 그래서 의미와 단어 하나하나를 잘 맞추어야 시의 질서가 구축되는 것 같습니다.

    

시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나 암울한 사건을 보도할 때 중요한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였듯이 아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시인의 눈과 언어로 일그러뜨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빛과 소금처럼 환하고 밝게 보이지만, 아이들에겐 어두운 동굴을 헤쳐나가야 하는 위험한 모험의 여정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친살해, 유아 살해, 아동 유괴, 아이 살해 유기 등으로 얼룩진 세상인데, 근절은 되지 않고 날이 갈수록 잔악해집니다. 아이들은 태어나기 힘든 세상에서 힘들게 태어났지만, 태어난 아이도 유기되어 짐승의 먹이로 버린다는 비정한 세상 이야기입니다.

    

‘볕 잘 드는 마루에서 배부른 엄마가 잠든 애기 볼을 쓸고 있는데’ ‘밤에는 해도 없고 달도 없으니’ 공포에 질리고 우울합니다. 그런데 배고픔에 먹이를 찾아 달려온 ‘숨 가쁜 개’가 어슬렁거립니다. ‘개나리꽃 봄날 약수터’는 희망적이지만 ‘아이를 퍼다 나르는 노인들’은 절망적입니다. 친오빠든 사촌오빠든 오빠와 여동생은 따뜻한 남쪽 나라처럼 포근합니다, 그런데 믿고 따랐던 오빠가 누이의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으니 근친상간입니다. 그 상황을 다 알면서 감추어 준 벚나무들, 누이에게 치욕스러운 낮은 왜 그리 긴지요. 벚나무들과 낮은 그것을 알고도 친족간에 침묵을 강요하는 엉뚱한 인륜이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따뜻한 남쪽 나라(포근하고 따뜻한 친족)에 하늘이 분노하여 기록적인 폭설(천형-天刑)을 내릴 수밖에 없지요.

    

아이들이 목마를 타고 놉니다. 그런데 기록적인 폭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던 ‘덤프트럭이 눈길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지면서’ 전혀 위험을 모르고 있던 아이를 덮칩니다. 그 위험은 부드러운 폭설 같은 부드러운 위험이기에 더욱 감지하기 힘듭니다. 덤프트럭이 미끄러지며 덮쳐버린 목마는 찌그덕 찌그덕 아이들을 허공으로 내던집니다. 아이들이 내던져진 허공은 건조하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현실을 비웃습니다. “이래도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나요?” 아이들이 안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뒷골목, 놀이터 그 어디도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횡단보도에 언제 차가 덮칠지 모릅니다. 곳곳이 위험합니다.

    

아이는 무섭습니다. 아이는 버려지고 ‘아이인 나의 이마에 고양이 손톱’이 깊게 박힙니다. 고양이는 아이 목을 먹고 아이 울음을 웁니다. 현실은 함정처럼 뻥뻥 뚫린 하수구입니다. 그곳에 고양이의 어미인 사자가 삽니다. 사자는 계속하여 고양이를 낳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위험이 양산되는 곳이지요. 사자는 위험인 고양이를 낳는 이 세상 실체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사자의 실체를 밝히고 사자를 처단하려 하지 않고 고양이 울음에만 집착합니다. 하수구는 아이들이 위험한 현실이며 모순된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나를 비닐 속으로 집어넣으니 내 숨은 점점 막혀오고 내 목소리는 변하게 됩니다. 드디어 숨이 막혀 나는 끊임없이 늘어지고 몽롱한 상태에서 구렁이를 밟았으니 저승일 것입니다.

    

이렇듯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아이에게 위험이 확대 재생산되는 곳입니다. 할머니는 나의 할머니가 아니라 아이를 유괴하는 마귀이지요. 그 마귀는 쓰레기처럼 아이를 비닐 속에 집어넣고 유기합니다. 아이를 유기하는 세상은 구렁이가 꿈틀거리는 지옥처럼 차갑고 무섭습니다. 이제 막 생명의 대로에 나가려는 아이들의 세상은 봄날 같은 희망의 빛이어야 하는데, 주검처럼 무섭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믿을 게 없습니다. 차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인터체인지》에 버려진 것처럼 위험하고 갈 길이 험합니다.

    

시인 박용진은 198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출생하여 2006년 『서정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10월 20일 첫 번째 신작 시집 『미궁』(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을 발간했습니다. 그의 시는 제목인 『미궁』처럼 헤매게 합니다. 그는 시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밤은 깊고 해가 없습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할 만큼 밝고 슬퍼서 우리의 밤은 깊고 달이 없습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할 만큼 어둡고 슬퍼서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없습니다//아버지가 우리를 삼키는 동안 그저 오래 사랑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미궁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잡힌 세상은 미궁처럼 낯선 곳이지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이며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는 곳입니다.

    

다시 시 《인터체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과거에도 인터체인지는 있었지만, 문명사회엔 인터체인지가 너무 많습니다. 아이에게 인터체인지는 어디일까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는 곳일까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결과물로 생성된 아이의 원자가 생명의 길로 들어서려는 순간일까요?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온갖 험한 고비일까요? 나는 그 총체라고 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아이가 인터체인지에 섰습니다. 엄마들은 출산의 고통을 피해 제왕 절개로 아이를 낳습니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연 분만만큼 탄생의 기쁨과 애착도 적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진국은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왕절개를 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성들의 제왕절개비율은 세계 1위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6년부터 2018년 9월까지 출산한 15~49세 여성 1784명을 대상으로 분만 방법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제왕절개 분만이 42%, 자연 분만이 58%였습니다. 이 조사는 3년마다 이루어지는데 2015년 제왕절개 분만 39%보다 높아졌으며,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조사한 전 세계 150개국의 평균 제왕절개율 19%보다 높습니다. 이는 늦은 결혼으로 인한 늦은 출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늦은 결혼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생존 환경이 얼마나 힘든가를 말해주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결혼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늦은 결혼은 아이를 인터체인지에 버려두게 만듭니다. 늦은 결혼은 늦은 출산을 초래하고 늦은 출산은 위험을 피해 출산을 포기하게 되지요. 그러면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의 원자는 자궁의 미로에서 살해되지요. 우리나라의 자발적 비혼주의자들이 20% 이내인 것을 보면, 나이든 비혼자들 상당수는 독신주의라기보다는 사회적 환경 문제로 ‘결혼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날아갈수록 나빠지는 청년 실업, 치솟는 집값, 부실한 공교육과 늘어가는 사교육비, 치열한 경쟁 사회, 여성의 경력단절 등 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회적 문제이지 개인 가치관 문제만은 아닙니다. 결혼 포기와 늦은 결혼은 출산 포기를 초래하고 출산 포기는 낙태율을 높이고 있습니다.

    

낙태를 탓할 수만은 없지요. 원치 않는 임신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문명화된 성이 자유화된 사회에서 낙태를 금기하는 것은 시대착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가 만연되어 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것이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고 생명경시와 종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임신중절 수술률(인구 1000명당 임신 중절 수술 건수)은 2005년 30%에서 2011년 16% 2017년 5%로 떨어졌지만, 낙태약 불법 구입 건수는 2013년 1만 8665건에서 2018년에는 2만 8657건으로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낙태유도제 온라인 불법 거래 적발 건수도 2013년 514건에서 2018년 2197건으로 5년 사이에 4배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성의 자유와 출산의 자기 선택권의 확대로 볼 수 있지만, 성의 자유 저변에 깔린 생명경시의 풍조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피임에 대한 의학의 발달은 문명이 준 혜택이자 문명의 반란입니다.

    

전남 무안의 친딸 살해 방조 엄마의 사례에서 보듯이 엄마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에게 엄마는 최후의 보루이며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어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미혼모와 버려지는 아이들의 증가도 그 한몫합니다. 모성은 여성이 천부적으로 가진 자연성입니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투쟁하고 자유와 유희를 쫓는 것은 자연성인 것 같지만 상당히 문명적입니다. 문명은 인간을 자연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지요. 여성이 모성을 포기하면 잔인하게 될 수도 있으며 종족에게도 위협이 됩니다. 그것도 문명의 부작용이라 여깁니다.

    

세상 곳곳이 아이들에게 위험한 인터체인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평택 아동 살해 암매장 사건,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 부천 초등학생 토막 살인 사건, 부천 여중생 백골 살인 사건, 울산 울주군 여아 학대 사망 사건, 울산 입양아동 학대 사망 사건 등 계속하여 끔찍한 사건들이 고리를 물고 있습니다.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인 것 또한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이에게 위험한 인터체인지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아이를 안심하고 밖으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돌아오기 전에는 늘 불안합니다. 아이를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홀로 인터체인지에 세우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등은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총체적으로 아이들을 인터체인지에 버려두게 된 것은 문명의 산물입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었지만, 생명경시와 왜곡된 유희, 치열한 경쟁을 부채질했습니다. 그리고 문명은 인간의 근원적 가치관을 변질시켰지요. 생명의 측면에서 보면 문명은 또 다른 [미궁]이며 인터체인지에 선 아이의 모습입니다. 창조와 생명파괴의 두 얼굴을 지녔지요.

    

아이들이 태어나 잔혹하게 고양이의 먹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태어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봅니다. 그것만이 모성이란 자연성을 회복한 더 진보된 문명사회라 생각합니다. 이제 모두가 나서서 《인터체인지》에 버려진 아이를 구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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