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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한국인이여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상호 | 입력 : 2020/01/13 [13:44]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올 새해는 예년보다 조용하게 맞이한 것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새해 해맞이객들로 길이 꽉 막힐 지경이었는데 올해는 덜했습니다. 특정 지역은 해맞이객들로 붐볐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한산한 편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희망의 해맞이도 지쳐가는 것 아닌지 걱정입니다. 

 

우리나라가 IMF를 겪던 1998년 1월 1일입니다. 그때는 희망의 해맞이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지요. 사람들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희망의 끈을 잡으려 안간힘을 섰습니다. 그 때 저도 당시 중3인 딸이 해맞이를 꼭 정동진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정동진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여 12월 31일 밤 1시에 출발했습니다. 심야의 경부고속도로는 한가한 편이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정동진에 쉽게 도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고 얼마 가지 않아 길이 꽉 막혔습니다.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해맞이객들로 길이 꽉 막힌 것입니다.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시쯤 되었습니다. 차를 세울 수가 없어서 아내와 둘이 번갈아 가면서 차를 운전하여 휴게소를 돌면서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차 안에서 준비해간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강릉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 30분, 정동진도 승용차와 관광버스로 만원이라 차를 세우고 들어갈 틈도 없었습니다. 딸이 회를 먹고 싶다고 하여 동해로 향했습니다. 동해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항구의 횟집도 문을 닫았습니다. 금강산 관광객을 실어나르던 금강호만 찬란한 불빛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이들은 화장실을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차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자니 차가 너무 막혀 출근도 못할 것 같아 정선, 단양으로 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밤길을 이정표만 보고 운전을 했습니다. 정선에 도착하니 밤 11시 싸 간 음식도 동이 났습니다. 구멍가게에서 간신히 만두와 어묵을 사와 차 안에서 먹고 어둠을 뚫고 운전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 2시 30분경이었습니다. 24시간을 차 안에서 지낸 것입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해맞이를 갔습니다. 몇 년 전에도 시청에서 하는 해맞이 행사에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새해 해맞이는 소원을 빌고 희망을 다지는 시간입니다. 새해 해맞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아주 어려웠던 1980년대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나아가자고 절규하듯이 외친 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입니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정호승(1950~ )-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정호승 시선집 『내가 사랑한 사람』열림원, 2014, 70-71쪽)- 

 

이 시는 개인적 소망을 담은 서정적 자유시이면서도 상당히 의지적이고 상징적이며 교훈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시는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만드는 삶의 자세를 가지자는 결의인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강한 명령조의 시어를 반복적으로 구사합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옛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던 우보(牛步) 민태원(1894~1935)의 「청춘 예찬」이 떠오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절망에 빠진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 삶의 기백을 일깨워 준 「청춘 예찬」처럼 정호승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80년대의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피며 용기와 기백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가 주는 그 희망의 불씨는 시공(時空)을 넘어 타오를 것입니다. 

 

시의 1연과 2연은 비슷한 구조를 지닙니다.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며 뒷부분에서는 그런 절망적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강한 삶의 자세를 당부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는 암담한 현실에 처한 절망의 시간과 공간입니다. “홀로 일어난 새벽”은 처절하도록 외롭게 절망에 빠진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 말고 희망의 나침반인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당당히 일어서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고 역설합니다. 

 

2연에서 극에 달한 절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외칩니다. ‘깊어서 눈만 내리는 겨울밤’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은 계속되는 절망 속에 갇혀버린 고단한 현실입니다.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은 차디찬 감옥과 같은 절망과 고통의 절정이지요. 그러나 우린 그런 ‘절대적 슬픔’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연의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은 절망과 슬픔이 너무 크기에 감히 절망이라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희망의 “봄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워하며 간절히 기다리던 세상입니다. 그때 우린 역경을 딛고 일어서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모두가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으며, 절씨구나 뺨 부비며 함께 울며’ 기쁨과 환희의 잔치를 열자는 것입니다. 봄이 오듯 희망은 반드시 올 것이란 확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아, “별(희망의 나침반)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희망이 가득한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꿈은 끝없이 쏟아지리니 희망의 순간이 올 것이란 확신으로 오늘을 견뎌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시는 지금은 절판된 정호승의 초기 시집 『 서울의 예수』(민음사,1982)에 처음 실린 작품입니다. 그땐 80년의 봄을 맞이하면서 전국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 된 시절입니다.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졌고 나라는 혼란 속에 허우적거렸습니다. 시인은 그때 대한민국 사람들 특히 청년들에게 ‘결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역설한 것이라 여깁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청년들에게 청춘의 기상을 가지라는 민태원의 『청춘 예찬』처럼 말입니다.

 

새해 해맞이를 하지 않고 조용히 보내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평안하고 문제가 없어 조용히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이미 희망마저 잃고 체념하면서 그저 주어진 현실에 살기 급급한 무기력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이면 다행이지만 후자이면 절망입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희망의 언어가 아닌 절망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보면, 올해의 해맞이가 전해보다 덜 붐볐던 것은 사람들 내면에 고단한 현실과 암울한 미래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 도사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정부에서는 성과를 내세우며 희망적인 말을 하지만, 사방에서 위기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첫째는 청년들의 절망입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OECD 국가들의 청년고용지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청년 실업자는 지난 10년 동안 OECD평균 14% 감소했지만, 우리나라는 28%가 늘었습니다. 서울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어 청년들에게 더욱 큰 절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2019년도 세계 무역보고서’에 의하면 노동인구는 점점 줄어들어 한국의 노동인구는 2040년이면 2018년보다 17%가 감소할 것이라 추산합니다. 한국의 전체 인구 변화는 적지만 저출산․고령화의 여파로 15~65세의 생산인구가 급격하게 줄어 경제성장에 지장을 줄 것이란 예측입니다. 거기다가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생~1963년생) 중 65세 이상이 800만 명(인구의 15.4%)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생산 현장에서 밀려나며 노후대책이 부족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복지비용은 점점 커질 것이란 전망입니다. 복지비용을 증대시키려면 생산성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우리 경제는 그러기에 너무 힘이 겨운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나홀로 사장이 100만 명을 넘어섰고 가계부채는 1500조 원을 넘어서고 있으며 특히 경제의 허리라고 하는 중산층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중산층은 ‘중위소득의 50% 초과 150% 이하’에 분포된 소득계층으로 2019년 한국의 중위소득은 4인 가구 기준 월 461만 원입니다. 230만~690만원을 벌어들이면 중산층이라는 얘기인데 이 기준에 따르면 2019년 2분기 기준으로 중산층 비중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비중은 2015년 67.9%, 2016년 66.2%, 2017년 63.8%, 2018년 60.2%, 2019년 58.3%로 하락했습니다. 70%에 육박했던 이 비중이 50%대로 추락했으며 특히 자산 중산층은 33.1%로 추락하여 비상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2019.9.30.)

 

여기다가 고용지표는 급속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월간 노동리뷰 2019년 3월호에 따르면, 30대 연령층은 전년 동월에 비해 취업자가 12만6000명 감소하면서 2.2% 줄었습니다. 전월로 비교해도 2018년 12월 30대 초반 취업자는 249만2000명에서 2019년 1월 246만4000명으로 2만8000명 감소했으며, 30대 후반은 305만7000명에서 2만명 감소한 303만7000명으로 집계됐습니다. 40대 취업자는 2018년 12월 661만1000명에서 2019년 1월 7만2000명 감소한 653만9000명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전년 동월 대비 감소폭이 11월 12만9000명에서 12월 13만5000명, 1월 16만6000명으로 가파릅니다. 경제 핵심 연령층의 취업자 규모가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일자리 지표도 악화했습니다. 고용노동부의 최근 발표를 보면 2019년 1월 마지막 영업일 기준 종사자 1인 이상 국내 사업체의 빈 일자리는 16만6700개로, 1년 전의 20만6417개보다 3만9717개 감소했습니다. 빈 일자리 감소 폭은 2011년 9월(6만850개) 이후 88개월 만에 가장 큽니다. 빈 일자리란 현재 비어 있거나 1개월 안에 새로 채용할 수 있는 일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노동 시장에서 실업자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활용됩니다. (디지털 타임즈 2019.3.18.)

 

2019년 우리 사회의 4V(Vacant) 공포는 더 큰 절망입니다. 4V 공포는 4가지 빈(Vacant) 현상으로 첫째는 빈손 공포입니다. 자영업자들은 사업을 해도 빈손이며, 중산층과 저소득층도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것이 없는 빈손이며, 은행에 예금해도 남는 것이 없는 빈손이란 것입니다. 둘째는 빈집 현상입니다. 이 빈집 현상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선진국에서 이미 도래한 것으로, 한국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농촌의 빈집은 급격하게 증가하고 농촌 공동체는 해체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 지역도 낙후된 지역은 슬럼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울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지방 집값은 떨어집니다. 그러니 지방 자본까지 서울로 몰리고 있습니다. 셋째는 빈 상가입니다. 이제 상가는 꿈의 투자처가 아닙니다. 빈 상가는 늘어나는데 장사를 접고자 하는 업주들이 늘어납니다. 시내에 나가면 곳곳에 빈 상가이며 임대한다고 써 놓은 곳이 날로 늘어납니다. 빈 상가가 늘어나면 건물주도 위험해지며 경제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킵니다. 넷째는 빈 산업단지 문제입니다.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산업단지는 기업이 입주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빈 산업단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방은 인구 감소에 산업단지가 비어가니 해체의 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특히 더 절망적인 것은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결혼하여도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출산과 육아는 미래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투자입니다. 옛날 어느 집안 어느 왕조도 대를 이을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고 결국은 나라도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취업은 어렵고 소득은 줄어들고 집값은 뛰는데 앞은 보이지 않으니 감히 결혼하여 아이 낳을 엄두를 못 내는 것이지요. 그것을 젊은이들의 가치관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위기는 평화의 시대에도 늘 수면 아래서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기를 감지하고 그 원인을 살펴 지혜롭게 극복해내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국민, 지혜로운 정부는 그 위기를 잘 감지하고 잘 극복하는 국민과 정부이지요. 우리 민족은 과거에도 그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다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희망보다는 체념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체념이 너무 오래되면 희망을 버립니다. 희망은 사람이 살아갈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몸이 아파도 희망이 있는 한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지면 죽음을 가까이 합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쓴 80년대 초는 군부정권에 의해 민주화의 꿈이 좌절되는 것을 보고 ‘희망을 가지라’고 역설했지만, 지금은 정치, 경제, 출산, 취업 등 전방위적인 절벽에 서 있는 한국인들에게 절벽 같은 절망을 딛고 서는 가장 큰 동력은 희망이란 메시지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때는 개개인에게 희망을 역설했지만, 지금은 정부가 국민에게 희망을 줄 것을 간곡히 역설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체념적으로 현실에 주어진 삶을 사는 것보다 강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삶의 더 큰 에너지임은 많은 연구에서도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새해에도 가게의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현실, 해맞이보다는 조용히 집에서 보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실이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희망을 잃고 살기에 급급한 체념적 현실 인식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다시 정호승의 시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를 읽으며, 절망적이었던 80년대 초나 IMF 구제금융을 맞이했던 90년대 말에도 새해 해맞이를 통해 강한 희망의 끈을 잡으려 했듯이 한국인이여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한국 정부여, 국민에게 《희망을 만들어주는 정부가 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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