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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나를 지우고》 상생의 길로 갈 수 있을까요?

이상호 | 입력 : 2020/02/14 [09:03]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지금의 한국 상황은 조선 시대의 당쟁과 사화를 연상하게 합니다. 극심한 당쟁과 사화는 뼈까지 사무치도록 권력투쟁으로 상대편을 처단하다가 결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러고도 정신 못 차리고 대립하다가 주권까지 상실하는 처참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의 대립과 무능이 민생을 얼마나 파탄에 빠뜨리는가를 우린 역사 속에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이분법적 대립과 투쟁의 역사는 종식되지 않고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최근에 와서 그런 이분법적 대립구조가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분법적 대립구조의 기저에는 나는 선(善)이고 너는 악(惡)이라는 작위적(作爲的)인 도덕 프레임과 상생보다는 상대를 딛고 내가 서는 타도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죽이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정치 상황과 의식구조에서는 상생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고, 영원한 대립과 투쟁만 양산될 뿐입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국민도 정치인들의 그런 대립구조 속에 빠져 진영논리에 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의 이분법적 의식구조는 여러 측면에서 나타나지만, 특히 정치 상황에서 가장 강합니다. 지금 우린 역사와 의식구조 그리고 현실 정치에 깊이 박혀 있는 이분법적 대립구조를 넘어서야 할 중대한 시점에 있습니다. 국민이든 정치인이든 이분법적인 틀에 강하게 갇힌 것은 생활과 내면 깊은 곳에 ‘강한 나’를 위해 ‘너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야 상생과 발전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는 상생과 발전을 향한 성찰과 모색의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우고 

-오세영(1942~ )-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오세영『바이러스로 침투하는 봄』(렌덤하우스 중앙)에서-

 

 

 

모더니즘적인 시로 출발하여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현실적인 문제에 접근하면서 문명의 모순을 꼬집는 문명 비판적인 시를 쓰다가 다시 통합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으로 변모한 오세영 시인은 《나를 지우고》를 통해 상생과 화합의 더 큰 ‘나’로 나아가기를 간구합니다. 나를 강하게 지키고 고집부리면 절대로 상생과 화합을 통한 ‘더 큰 나’ ‘더 큰 세계’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고 ‘나’를 지키기 위한 투쟁만 남게 되지요. 그럴 경우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됩니다. 

 

이 시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반복 기법으로 전반부의 언어가 후반부의 언어를 통해 더 강하게 어필(appeal)됩니다. 우리는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며, 더불어 산다는 것은 타자의 수용을 통한 끊임없는 나의 수정과 비정형적인 진화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산에서 산 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산에 맡깁니다. 《나를 지우고》 산을 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고 강조합니다. 나를 지우지 않으면 산과 더불어 살 수 없다는 말이지요. 

 

시는 점층법을 활용하여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점점 나아갑니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나무보다 더 큰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숲보다 더 큰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입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고 숲은 나무를 품습니다. 나무는 하나의 개체이지만 숲은 그 개체를 존중하며 품습니다. 나무는 작은 개체이지만 숲은 보편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무보다 큰 존재인 숲은 더 큰 존재인 산이 되기 위해 또 자신을 지워야 합니다. 그래야 산이란 보편의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시인은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이라면서 보편진리인 상생의 원리를 강조합니다. 상생의 보편진리는 “나”만 지워서는 안 되고 “너”도 지워야 합니다. “너”가 “너”를 지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지워야 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진리의 세계로 가기 위한 쌍방부정의 원리이지요. 모든 위대한 탄생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부정을 통해 새롭게 거듭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쌍방부정은 이분법적 대립구조에서 나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법적 대립구조에서 나를 버린다는 것은 ‘나’의 백지화를 통해 ‘너’에게 가거나, 새로운 세계로의 나아감을 의미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쌍방부정은 ‘나와 너의 모순’을 부정하면서 정제된 각자의 정체성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통합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말하는 이항대립구조(二項對立構造)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틀의 구축과 비슷합니다. 자크 데리다에 의하면, ‘선과 악’ ‘주관과 객관’ ‘신과 악마’ 같은 대립적 우열 구조는 구조 자체가 갖는 모순성을 밝힘으로써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틀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A냐 B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며, A를 논박하기 위해 B를 동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A와 B 내부의 모순을 논박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스스로 나를 버린다는 것은 스스로 내부모순을 논박한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늘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살아가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진리는 쌍방의 아름다운 부정을 통해 끊임없는 통합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사람과 사물도 하나의 등가(等價)로 통합되어 상생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들의 고집 때문에 늘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리고 상생통합의 길로 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한 떨기 초롱꽃도 그리움이란 것을 살라 먹어야 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생의 씨앗입니다. 그 작고 아름다운 존재도 버림과 버림, 존중과 존중을 통한 내부모순을 극복하지 않고는 새로운 탄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관념이 발전하여야 더 큰 세계가 열립니다. 시인은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이슬이 상상도 못 한 새로운 세계인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그 안개가 상상도 못 한 “푸른 하늘”이 된다고 부정을 통한 상생과 발전의 진리를 반복 강조합니다. 안개는 나를 부정한 이슬의 집합체이며 푸른 하늘도 ‘나’를 부정한 안개들의 집합체들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서도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고 강조합니다. 

 

시(詩)에서 말하는 나무, 숲, 이슬, 안개 등이 ‘나’를 버리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지니면서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통합으로 나아가는 개체들입니다. 그리고 산은 어떤 존재일까요? 산은 다른 존재에 비해 변형되거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며, 인간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는 영속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산은 나무와 숲과 새와 동물 등 모든 것을 품는 보편적인 수용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산은 보편적인 상생의 세상이요 진리이며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영겁의 공간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산은 관념적으로는 합일된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며 진리의 세계로 생각됩니다. 그 진리의 세계는 태초의 통합된 하나의 세계입니다. ‘나’는 그 우주의 일원이며 우주와 통합된 존재이지요. 그래서 ‘나를 지움’으로 나와 우주는 융합된 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존재는 분열과 투쟁인 ‘시비와 차별’ ‘대립과 갈등’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개별자로서의 “나”와 “너”를 지우고 내부모순을 극복하며 자기 정체성을 확대하여 상호작용하는 통합원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시에선 모든 사물과 인간은 상호유기적인 평등한 존재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나”라는 개별자일 때, 그 개별자는 서로 단절되어 소통과 통합의 세계로 갈 수 없기에 존재의 의미가 없으며, 단절되었기에 투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별자들은 ‘나’를 버려야 상생과 통합의 우주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려면, 《나를 지우고》 통합을 통한 상생과 공존의 세계로 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시(詩)를 한국의 정치 상황에 연결해봅니다. 조선의 역사를 망친 당쟁과 사화가 큰 문제였던 것은 당쟁 자체가 아니라 당쟁을 통한 상대방의 철저한 부정에 있었으며 그 내부엔 강한 ‘나’만 존재하였지 ‘너’는 존재하지 않는 철저한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 ‘너’는 죽이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적폐청산’ 이란 명분으로 이전 권력에 대한 철저한 보복과 죽임을 반복한 것이지요. 그것이 엄청난 피바람을 불러온 사화입니다. 이전 권력을 적폐로 몰아 죽이는 권력은 그때마다 나름의 명분을 확보했습니다. 또 당쟁이 큰 문제였던 것은 조선의 지방 고을까지 뿌리 깊었던 인맥정치(계보정치)입니다. 조선 시대는 서원뿐 아니라 각 고을 구석에 있는 서당 훈장까지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어느 계열에 서서 지지와 비판을 했으니까요. 

 

해방 후의 우리 정치에서 큰 문제로 지적된 것 중 하나가 계보정치였습니다. 전에는 3김 시대의 계보정치를 청산해야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그들이 사라진 지금은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친박, 비박, 친노, 친문...하는 망령들이 모두 그것입니다. 그런 계보정치에서는 합리보다는 누구의 편에 서느냐 안 서느냐가 우선입니다. 지금도 청와대만 들어갔다 나오면 대단한 인물처럼 둔갑이 되고 지방자치 단체장이든 국회의원이든 누구누구 비서실장이었던 것을 내세워 출사표를 던집니다. 그런데 청와대에 근무했다고, 누구누구의 비서실장을 했다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 검증이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는 단순한 누구의 계보일 뿐이며 그에게 줄을 잘 섰기 때문에 선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계보정치에선 능력보다 계보의 후광과 진영의 영향을 더 받습니다. 

 

과거의 정권에서는 반공 프레임, 좌익프레임, 통일과 반통일, 민주화와 반민주 등의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치열한 대립을 거듭했는데, 지금은 적폐 청산, 촛불과 태극기의 극렬한 대립, 친일과 반일, 진보와 보수 등의 전방위적인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대립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문제로 국민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촛불과 태극기로 대립하더니, 올해는 정초부터 청와대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의혹을 둘러싼 검찰 기소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대립이 심상치 않습니다. 역대 어느 나라의 정권도 집권 시절 검찰과 각을 세우며 이토록 딴소리를 내는 사례는 없었습니다. 검찰총장의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며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에는 늘 능동적이지 못했는데, 그 검찰이 현 정권의 구미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개혁이란 이름을 내세워 극도의 대립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대립의 기저에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합니다. 

 

또 패스트트랙이란 정국으로 끝없는 대치 속에 전혀 생산적이지 못했던 국회는 결국 지난 연말에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강행 통과시켰습니다. 여기에는 진영 간에 끝없는 공격과 방어만 이어졌습니다. 상대를 이기고 내가 서기 위한 대립과 투쟁, 공격과 방어의 연속적인 상황에선 중국의 전국시대처럼 승자와 패자만 있을 뿐입니다. 승자는 한때 승리를 구가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황이 역전되어 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보수진영에선 보수 통합을 오래전부터 내걸고 있지만 《나를 지우고》 너를 받아들여 새로운 세계로 나가지 못하니 지리멸렬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영역에서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각 계보와 진영에서 자기 성찰을 통한 자기모순을 발견하여 극복하지 않고 참호에 숨어 공격과 방어 전술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영논리와 대립구조에선 A가 B만, B가 A만 논박 공격하지 A, B 각자 내부의 모순을 논박 공격하면서 ‘나를 버리는’ 성찰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부모순을 논박하는 자가 있으면 정치생명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는 정치인과 정치 집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 상당수가 그들의 진영논리에 편승하여 지지와 비판에 무조건 합세한다는 점입니다. 일부 좌파는 보수를 ‘수구꼴통’이라 무조건 배척하고 일부 우파는 진보를 ‘좌빨’이라고 무조건 매도합니다. 그 진영논리와 계보정치가 국민까지 이분법적 프레임에 가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구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작위적(作爲的)인 선과 악의 구조에 의해 서로 자기 진영은 선이고 다른 진영은 악이라고 하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진영논리와 계보정치의 이분법적 대립구조는 큰 병리현상입니다. 그 병리현상은 치유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죽음이거나 기형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상생과 발전은 더욱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치유하는 길은 각자가 《나를 지우고》 내부모순의 부정을 통해 상생과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상생과 화합의 보편세계인 ‘산’과 더불어 살기 위해 진영논리를 버리고 내부모순을 극복하며 ‘산’으로 나아가는 자기 성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한국이 상생과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고질적인 이분법적 프레임과 인맥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는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그래도 걱정입니다. 진정 한국은 《나를 지우고》 상생발전의 길로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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