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시(詩)로 세상 읽기] 엄마를 《폭탄 돌리기》 하는 슬픈 세상

이상호 | 입력 : 2020/05/19 [10:41]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어버이날이 지났다. 어버이날에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자는 온갖 문자와 카네이션 바구니들이 카톡으로 날아들었다. 스승의 날도 지났다. 역시 카톡으로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글과 꽃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다행스럽게 어버이날엔 자식들이 찾아왔고 스승의 날엔 몇 몇 제자들에게서 문자와 선물이 왔다. 

 

SNS가 발달한 요즈음 온갖 좋은 말들이 날아든다. 그것은 지인이 개별적으로 보낸 것이기도 하고 단체 카톡에 등록된 사람이 보낸 것이기도 했다. 의미있는 날에 좋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그 좋은 말들이 그냥 퍼 나르는 일상이 되어버리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면 허전해진다. 그 좋은 말들에 ‘사랑과 정성’이란 혼이 얼마나 깃들었을까? 

 

특히 어버이날에 어른끼리 보내는 카네이션과 축하 메시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작 자녀들이 부모에게 보내는 것이라면 카톡으로 보내는 카네이션과 축하문자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버이날에는 카톡이나 문자보다는 직접 찾아뵙는 것이 가장 좋고 그것이 어려우면 전화나 영상통화로 감사를 전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어버이날에 부모를 찾아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자식보다 그렇지 않은 자식들도 많다. 특히 요양원 등 시설에 있는 분들, 홀로 지내는 독거노인들은 어버이날에 TV 등에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웃에 자식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는 부럽고 쓸쓸한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부모 모시기를 기피하고 서로 떠밀며 병원에 계신 부모 병원비나 간병 문제로 서로 다투는 풍경을 보면, 오늘날 부모는 자식에게 폭탄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어버이날을 보내며 폭탄이 되어 쓸쓸하게 지냈을 많은 어버이를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시가 있었다. 신미균의 《폭탄 돌리기》였다. 

 

폭탄돌리기

 

- 신미균(1956〜 )-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들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신미균『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파란시선53, 2020)-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는 병들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엄마일 것이다. 그 엄마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 엄마이며 부모의 통칭이다. 병들고 허약해져 스스로 움직이기 힘든 엄마는 생을 마감하는 날을 기다리며 병원이나 요양원, 아니면 홀로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자식이 아예 없다면 스스로 체념하기도 하겠지만 자식이 있는 엄마의 마음은 어떠하랴!

 

병든 엄마(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장남의 책무감을 이유로 큰오빠에게 넘겼다. 엄마의 병세는 ‘폭탄의 심지가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들어 가듯’ 날이 갈수록 심해져 주변의 손길 없이는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즈음에 큰오빠는 ‘나만 자식이냐’면서 엄마를 작은오빠에게 넘겼다. 작은오빠는 간병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바로 언니에게 넘겼다. 

 

그래도 언니는 같은 여자로서 엄마를 조금은 간병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마의 병세는 극에 달하고 폭탄 뇌관의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듯”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언니는 다시 막내인 나에게 넘겼다. 내가 두려움에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 하자 큰오빠는 손사래를 치고 작은오빠나 언니 할 것 없이 모두 엄마를 외면하였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엄마”는 내 손에서 폭탄 터지듯 운명하였다. 

 

내 손에서 운명한 엄마는 자식들은 있었으나, 어느 자식에게도 마지막 안식을 구하지 못했다. 엄마의 한과 슬픔은 파편이 되어 자식들의 머리 위에 분수처럼 쏟아졌다. 지금도 살아계신 부모나 병든 부모를 폭탄 돌리기 하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시(詩)는 부모 부양을 기피하고 간병을 서로 떠미는 슬픈 현실의 반영이다. 

 

10여 년 전, 오랫동안 모셔오던 어머니가 갑자기 소화불량을 호소하였다. 가까운 의원의 처방으로 해결되지 않아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다. 췌장암이었다. 병원에서는 길어야 3개월이란 최후통첩을 내렸다. 더 큰 병원으로 옮겼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일주일가량을 어린아이처럼 눈물로 보냈다. 어찌하랴 아내와 대책 회의를 했다. 아내와 난 형제들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모든 책임을 안고 장기전인 간호에 들어가기로 했다. 바로 간병인을 구했다, 다행스럽게 아주 좋은 간병인이 왔다. 나와 아내, 나의 딸과 아들은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고 살폈다. 주말은 병원에서 함께 잤다. 간병인은 ‘할머니는 오후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자식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상에서도 퇴근하여 얼굴을 내민 나에게 나의 식사 걱정만 하였다. 그렇게 8개월을 넘긴 어머니는 좋은 날 좋은 시간에 운명하셨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아내는 ‘어머니가 우리를 도우셨다’고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의 병실은 8인실이었다. 거기엔 대부분 시한부 여성 환자들이 있었다. 어머니보다 늦게 들어온 옆자리에 계신 할머니는 자식들이 많았다. 자식들은 돌아가면서 간병을 했다. 2주쯤 지났을까? 자식들은 간병과 돈 문제로 다투었다. 나와 아내가 다녀가고 나면 그쪽 할머니는 어머니를 매우 부러워하셨다고 간병인이 말했다. 

 

몇 년 전 나는 어깨 수술로 열흘을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실 옆자리에 80대 중반을 넘긴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다리와 허벅지 뼈가 크게 부러져 대수술을 받았다. 그 할아버지는 사흘간을 사경(死境)을 헤매며 헛소리를 하다가 깨어났다.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자식들이 번갈아 가며 간병을 했다. 하루는 큰아들, 다음날은 작은아들, 그러다가 막내인 딸이 왔다. 결국엔 막내인 딸이 한동안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중년을 넘기는 딸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남자이고 딸은 여자였다. 그러던 중에 나는 먼저 퇴원을 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같은 자식이라지만 엄마에게도 편한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늙어가시면서 유독 우리 집에 오셨을 때는 편안하게 오래 계셨다. 그래서 오래 모시게 되었다. 나나 어머니에게 큰 다행이었다. 어느 집이나 결혼한 자식들의 집안 분위기는 각자 다르리라. 그래서 난 어머니가 편안해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양의 책무를 축복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 돈과 부양, 간병 문제로 다투고 엄마를 《폭탄 돌리기》 한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남긴 재산 문제로 형제자매간의 의리가 망가지는 집안이 한 두 집안이 아니며 병원에 둔 부모로 인해 형제자매간에 다투고 《폭탄 돌리기》하는 집안이 얼마나 많은가? 요양원에 근무하는 분들에 의하면, 요양원에 맡겨진 엄마들은 자녀들이 초기에는 자주 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 달에 한 번도 오지 않고 심지어는 일 년에 한 번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모두 자본과 편의가 중심이 된 문명사회의 풍토이며 병폐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상갓집에 가면 상주(喪主)의 슬픈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짐을 벗어 가벼워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예(禮)는 사치(奢侈)한 것보다 검소(儉素)해야 하고, 상사(喪事)에서는 형식(形式)을 갖추기보다는 슬퍼해야 한다. 조상(祖上)을 제사(祭祀) 지낼 때에는 앞에 계신 듯이 하고, 신(神)에 제사(祭祀) 지낼 때에는 신(神)이 있는 듯이 하라( 禮 與其奢也론 寧儉이오. 喪이 與其易也론 寧戚이니라. 祭如在하시며 祭神如神在하라.)”는 공자의 말씀(논어 팔일편)은 이제 의미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3일 후면 모든 것을 털고 웃으며, 차례도 관광지에서 지내는 풍토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자본화되어 간다고 하지만 살아계신 엄마를 《폭탄 돌리기》 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잔인하다. 

 

이제 한국도 완전한 고령화 사회가 되어 곳곳에 요양원이 들어서고 실버산업은 새로운 산업으로 등장했다. 치매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심각한 사회문제이며 곧 닥쳐올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 치매센터가 내놓은 ‘대한민국 치매 현황 2019’에 의하면 2018년 기준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75만 488명으로 추정했다. 치매 유병률이 10.16%였다. 10명 중 1명이 치매를 앓는다는 것이다. 연령별 치매환자수를 보면 65세〜69세 3만 2600명, 70세〜74세 6만 9854명, 75세〜79세 18만 8143명, 80세〜84세 20만 8,192명, 85세 이상 25만 1699명이었다. 이중 남성이 38% 여성이 62%로 여성이 더 많다. 많은 우리 엄마들이 치매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에 따라 치매노인 돌봄 비용부담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치매환자의 연간 관리비용이 2010년 1851만원에서 2018년 2042만 원으로 증가했다. 2018년 기준 국가 총 치매관리 비용은 15조 3000억원으로 국내총샌산(GDP)의 0.8%를 차지했다. 치매 1안당 연간 진료비는 약 337만원, 전체 치매노인 연간 진료비는 약 2조 5000억원에 이른다고 했다. 치매 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미래사회에 도래할 심각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치매는 의학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치매가 신체 노화의 생리학적인 면도 있지만, 상당수의 치매가 무료증과 운동 부족에서 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18년 일본 도쿄에서 화제가 된 NHK PD 오구니 시로(小國士郞 당시 39세)가 치매 노인을 대상으로 기획하여 실험한 “주문을 틀리게 하는 식당”의 사례는 치매에 대한 새로운 접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반려견과 함께 매일 산책하는 노인의 치매 완치율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무시할 수 없다. 부모에게 자주 전화하고 찾아가 부모를 무료하지 않게 하는 것은 부모를 치매로부터 보호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엄마를 《폭탄 돌리기》 하는 것은 엄마의 치매를 재촉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머지않은 후 나의 모습일 수 있다.

  

부모부양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면서 부모 부양의 문제로 법정 다툼도 늘어난다. 부모 부양이 어디 법으로 해결될 문제이던가? 초근목피로 살아가던 가난한 시절이라면 또 다르다. 지금은 그래도 먹고 살 만하지 않은가? 복지수준도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초근목피로 살아가던 가난했던 시절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노부모를 산속에 버리는 고려장 풍토가 있었지만, 그것은 폐습이었다. 가수 장사익의 노래 “꽃구경”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 눈물만큼은 아니라도 현실에서 우린 엄마를 《폭탄 돌리기》 해서는 안 된다. 《폭탄 돌리기》 당하는 엄마들은 우리 시대를 만들고도 시대와 자식들에게 배신당하는 슬픈 시대의 부모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려장 하고 돌아올 때, 뒤따르던 아들이 그 지게를 지고 오면서 나중에 아버지를 다시 그 지게에 지고 산속에 버리기 위해 가지고 온다는 아들처럼, 후세에게 《폭탄 돌리기》 당할 우리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5월은 무엇보다도 가족의 의미를 강하게 새겨야 하는 가정의 달이다. 가정에는 가족이 전제되며 가족의 중심에는 부모와 자식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엄마가 있다. 그래서 가정의 달에는 가족의 의미를 강하게 새기고 부모와 자녀의 끈끈한 사랑을 다져야 한다. 특히 어버이의 사랑을 생각해야 한다. 

 

엄마는 우리에게 자신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준 <아낌없이 자신을 준 나무>이다. 신미균의 시 《폭탄 돌리기》를 읽으며, 오늘의 세대들이 몇 마디의 글과 스케치만인 나무와 소년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책,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기를 희망한다. 엄마를 《폭탄 돌리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타락과 문명의 야만이다. 세상이 아무리 자본과 편리함에 병들었으며 바쁘고 이기적으로 변했다지만, 엄마를 《폭탄 돌리기》하는 슬픈 세상은 정말 끝내야 한다.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