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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을지라도.

이상호 | 입력 : 2020/09/08 [15:40]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벌써 가을 소리가 들린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긴 장마와 무더위에 몸서리쳤는데 귀뚜라미가 잠을 깨운다. 그런데 아직 난 여름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날의 자존심과 삶의 방법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 세상 모두가 자기가 붙잡고 싶은 것만 붙잡고 집착하는 것 같다. 

 

연일 계속되는 코로나 19에 대한 대책이 ‘방역과 사회적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이다. 코로나가 심해지면 단계를 높여 PC방, 노래방, 카페 등을 포함한 다중이용시설의 영업중지 명령이다. 그런 가운데 자영업자들의 삶은 점점 어려워지고 폐업과 실업자는 증가한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경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당과 야당은 서로 상대편을 비난하며 정쟁에 집착한다. 사람들도 이념과 진영에 사로잡혀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에만 집착한다. 그 집착이 까치가 철탑 위에서 철탑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다. 답답하다. 신미균의 시 《까치》를 읽는다. 

 

까     치      

- 신미균(1955〜 ) 

 

철탑 위에 까치 한 마리 있는 그림자 

운동장을 지나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쓰러지려는 철탑을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자만 보고는 알 수 없습니다 

철탑이 까치를 잡고 있든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든 

그림자는 운동장을 지나갑니다.

 

- <신미균 『웃기는 짬뽕』, 푸른사상, 2015> -

 

까치가 날아와 아침을 알렸다. 그리고 어느새 까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높은 철탑 위에 앉은 까치는 한낮이 온 줄도 모르고 철탑을 붙잡고 있다.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다. 나의 인생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세상도 붙잡고 있는 것에 집착하며 그렇게 흐르고 있다. 재난에 대한 각종 대책도 메뉴얼과 방역수칙 그리고 규제와 행정명령에 집착한다. 그러나 시원한 답은 찾지 못한다. 

 

철탑은 햇살이 비치어 쓰러지려는 듯 비스듬해 보인다. 그러기에 까치 한 마리가 쓰러지려는 철탑을 잡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의 삶도 쓰러질 듯 비스듬한 것 같다. 그래서 나이를 붙잡고, 과거를 붙잡고, 자존심을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도 쓰러질 듯 비스듬해 보인다. 곳곳이 불안하다. 까치 한 마리가 쓰러질 듯한 철탑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그런 세상을 그저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철탑이 쓰러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온전해질까? 방역만 잘하면 코로나를 잡을 수 있을까? 그림자만 보는 것은 아닐까? 그림자는 까치와 철탑의 실체가 아니라 그 투영일 뿐, 철탑과 까치는 한자리에 있지만, 그림자는 움직인다. 그림자를 움직이는 것은 까치도 철탑도 아닌 시간이란 본질이며, 그 매개는 햇볕이다. 문제는 본질에 있지 현상에 있지 않다. 

 

까치와 철탑의 그림자가 운동장을 지나간다. 까치의 그림자인지 철탑의 그림자인지 알 수 없다. 까치와 철탑은 우리가 집착하는 삶의 세계이고 우리와 관계하는 물상인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코로나 19를 잡고 사투를 벌이는 정부와 중대본인지도 모른다. 삶의 흔적이 까치의 그림자인지 철탑의 그림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것처럼, 삶과 모든 대책도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고 우기는 정당과 정치집단도 결국은 서로 우기며 엉뚱한 것만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 본질은 엉뚱한데 두고 말이다.

 

나는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삶은 오후로 향하고 있다. 내가 오후로 향하는지 나의 그림자만 오후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나는 현상과 허상에만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방역 잘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와 영업중지 명령에 동참만 잘하면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코로나 19 극복을 위한 방편이며 현상일 뿐 본질은 아니지 않을까? 

 

코로나 19의 극복을 위해 내세운 각종 방역과 사회적 거리 두기, 영업중지 명령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어떻게 할까? 한국은행이 지난 2분기 예금 취급기관 산업별 통계를 발표했다. 2분기 말 기준 예금 취급기관의 산업별 대출금 잔액은 모두 1328조 2천억 원으로 1분기 말보다 69조 1천억 원이 늘었다. 이런 증가 폭은 통계가 시작된 2008년 1분기 이후 최대란다. 산업별로는 서비스업 대출 증가 폭이 47조 2천억 원으로 가장 컸고, 도소매․ 숙박․ 음식점업은 18조 8천억 원, 부동산업 10조 6천억 원, 운수 창고업 3조 2천억 원이란다. 그만큼 사람들이 버티기 어려워 대출이 늘어나고 빚을 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리고 소상공인연합회가 9월에 전국 소상공인 3415명에게 코로나 19 재확산 후 업종 전망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응답자 22.2%는 폐업상태일 것 같다고 했고, 50.6%는 사업을 유지하고 있으나 폐업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는 답은 27.2%였다. 자영업자들의 반 이상이 폐업상태에 돌입하고 있다. 정부는 이들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면서 지원하려 한다고 한다. 과연 언제까지 지원할 수 있을까? 그 지원으로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우두커니 서 있는 철탑과 까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삶과 생각이 고착상태에 빠진 것 같다. 철탑은 늘 그 자리에 있고 까치도 그 위에 앉아 있다.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는 것인가? 철탑이 까치를 잡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우린 마치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철탑이 까치를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자기가 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정부도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코로나 19의 최선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그림자는 여전히 운동장을 지나가고 있다, 햇살은 그림자를 통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철탑과 까치는 햇살이란 존재를 못 보고 서로가 집착하며 붙잡고 있는지 모른다. 삶은 본질보다 현상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사회적 거리를 두어도 영업 중지 명령을 내려도 코로나 19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침전되고 있을 뿐이 아닌가? 그리고 기회가 되면 다시 기승을 부릴 것 아닌가? 영업 중지와 집합 금지의 반복만 할 것인가? 그 사이 반복하여 파괴되는 삶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삶도 현상과 허상만 잡고 본질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은 그림자처럼 흐르고 나의 삶은 저녁을 향해 운동장을 달려간다. 나는 시간이란 본질을 재빨리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삶에 집착하다 보면, 한가로이 햇살만 쳐다보다 보면, 나의 사상과 내가 하는 일에 집착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도 잊고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현상에 집착하다 보면 인생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권력이 권력과 업적과 인기에 집착하다 보면 국민이란 본질을 잃어버린다. 

 

운동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우린 그림자만 드리울 뿐이다. 그림자는 우리가 산 흔적이다. 그런데 우린 그 그림자를 제대로 쳐다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그림자는 운동장을 지나가고 만다. 그리고 뉘엿뉘엿 저녁으로 향하고 해가 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삶은 그렇게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저물어 간다. 세월도 그렇게 저물어 간다. 권력도 부귀도 그렇게 저물어 간다. 

 

까치가 철탑을 잡을지라도 철탑이 까치를 잡을지라도 그림자가 운동장을 지나가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지나가고 권력도 그렇게 지나가고 만다.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는 것이나 철탑이 까치를 잡고 있는 것이나 부질없는 집착이다. 시간은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만다. 그러니 집착을 버리고 그림자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살필 일이다. 

 

우린 지금까지 까치가 철탑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철탑이 가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엉뚱한 것, 고정된 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른다.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방역과 사회적 거리 두기만 잘하면, 다중시설에 대한 영업정지와 사람들의 집합 금지만 잘하면, 코로나 19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여파로 삶이 어려워진 이들에게 재난 지원금을 준다고 삶이 나아지고 코로나 19를 이길 수 있을까? 반복되는 영업중지 명령은 까치와 철탑이 서로 잡고있는 것 같은 현상이 아닐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는데, 그림자는 운동장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집착을 떠난 다른 방도는 없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라. 즉 그대는 지금이라도 곧 인생을 하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라. 즉 당신에게 남겨져 있는 시간은 생각지 않은 선물이라고” 그러니 집착을 버리고 인생을 겸허하게 성찰하면서 살아야 한다. 정치도 정파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성찰을 통해 국민을 위한 새롭고 창조적인 생각으로 접근해야 난국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까치》가 철탑을 잡고 있을지라도 시간은 흐른다는 점이다. 문제는 까치와 철탑이 서로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착을 버리고 본질을 향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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