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세상 읽기]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주는 역설

이상호 | 입력 : 2020/10/07 [09:16]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뉴스파고=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최근 두어 달 사이에도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회의 불합리와 삶을 성찰하게 된다. 최근에 접한 여러 죽음 중에 특히 가슴에 남아 세상과 삶을 성찰하게 하는 네 명의 죽음이 있다. 그것은 어느 60대 노인의 홀로 죽음과 배구선수 고유정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리고 한 지인의 기도 중에 잠자는 듯이 맞이한 죽음이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죽지 않는 생명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죽음을 상상하기도 한다. 죽음은 안타까움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죽음을 접하면서 죽음이 안타까움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다가올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축복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의 시 《가난한 이들의 죽음(La mort des pauvres)》을 읽으며 세상과 삶과 죽음을 성찰한다.

 

가난한 이들의 죽음(La mort des pauvres)

 

샤를 보들레르( 1821〜1867)

 

위로도, 살게 하는 것도, 죽음! 

죽음은 삶의 목표, 단 하나의 희망. 

마법의 약처럼 우리의 몸을 취하게 하여 

저녁까지 걸어갈 힘을 주네 

 

죽음은 태풍과 눈발과 서리를 뚫고 

우리의 검은 지평선에 비추인 빛 

먹고 자고 앉아 쉴 곳을 주는 

책에도 나온 유명한 민박집 

 

죽음은 자석으로 된 손가락으로 

잠과 무어지경의 환상을 선물하는 천사 

가난하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네 

 

죽음은 신들의 영광 

신비로운 다락방 

가난한 사람의 재산, 오래된 고향 

미지의 천국으로 열린 문!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Les Fleurs du Mal)』,문유림, 김대영 옮김, 알비>

 

무심코 읽으면 이 낭만적 상징주의자의 시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죽음을 엄청나게 예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죽음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축복이 되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 죽음을 축복으로 맞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죽음의 예찬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삶에 대한 성찰이며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총 4연으로 구성된 시는 첫 연에서는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서의 죽음이다. 둘째 연은 치열한 삶의 휴식으로서의 죽음이며, 제3연은 아름다운 죽음을 향한 염원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마지막 연은 비로소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마치 단테의 신곡을 연상하게 한다. 나는 보들레르가 단테의 신곡을 연상하며 이 시를 섰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 봤다. 

 

제1연 만 보면 엄청난 죽음 예찬이다. 죽음은 ‘삶의 위로이며 살아가는 힘이며 마법의 약처럼 몸을 취하게 하여 저녁까지 걸어갈 힘’을 주는 엄청난 힘이다. 이쯤 되면 죽음 예찬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죽음이 “삶의 목표이며 단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기 위해선 저녁까지 힘차게 걸어가야 한다. 저녁은 목적지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걸어가면서(살아가면서) 도달한 안식처이다. 저녁이 있기에 ‘가난한 이들’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 가난에 찌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고통을 언제 끝낼까?. 죽어야 끝내지” 맞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어쩌면 죽어야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삶의 이면에는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목숨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악착같은 생명과 삶에 대한 애착이 숨어 있다, 우린 죽음에 대하여 성찰할 때 인간이 가진, 아니 모든 생명체가 가진 생명과 삶에 대한 애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명이 주어질 때까지 살아야 한다. 

 

여행자에게 여행길은 순탄한 길, 아름다운 꽃길만이 아니다. 경험해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며 깨달음의 길이다. 그 여행의 과정에선 고통과 희열이 교차되며, 여행자는 그 모든 경험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여행을 마치고 혹은 그 중간에 맞이하는 안락한 휴식은 축복이며 보람이다. 삶은 여행이다. 그 삶의 여행도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며, 그 여행에서 ‘태풍도 만나고 눈발과 서릿발’도 만난다.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다. 그래야 “검은 지평선에 비추인 빛”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린 삶을 성찰하고 깨닫고 희열을 맞이한다. 그리고 종착지인 죽음에 이른다. 

 

제2연에서 죽음은 “태풍과 눈발과 서리를 뚫고 우리의 검은 지평선에 비추인 빛”이며 “ 먹고 자고 앉아 쉴 수 있는 곳을 주는 책에도 나온 유명한 민박집”이라고 한 것은 삶의 여정 후에 맞이하는 안식이다. 이것은 마치 단테가 <연옥편>에서 말하는 제2의 목적인 “영원의 행복”을 얻는 길목인지 모른다. 민박집은 바로 그 연옥의 길목에 있는 집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인간은 단테의 말처럼 신의 은총에 힘입으면서 믿음 ·소망 ·사랑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를 때 저승사자가 아니라, 천사가 나타나 주기를 바란다. 천사의 안내를 받을 때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편안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런 죽음을 원한다. 제3연에서 “죽음은 자석으로 된 손가락으로 잠과 무아지경의 환상을 선물하는 천사”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곡에서 단테가 밤길을 잃고 헤매며 번민의 하룻밤을 보낸 뒤 빛이 비치는 언덕 위로 가려 할 때 3마리의 야수(野獸)가 길을 가로막아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때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고 길을 인도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를 먼저 지옥으로 안내한 다음 연옥의 산(山)으로 인도하며 산꼭대기에서 단테와 작별하고 베아트리체에게 단테의 앞길을 맡긴다.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은 단테는 지고천(至高天)에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한순간 신(神)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천사는 고단한 이들에게 안식의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여기서 ‘잠과 무아지경의 환상’은 지고천에서 보는 신의 모습이 아닐까? 천사는 베아트리체를 연상하게 한다.

  

천사는 비로소 “가난하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준다. 가난하고 벌거벗은 이들은 누구일까? 정말로 재산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시의 맥락으로 보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일 수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진리를 갈구하는 자들이며, 시(詩)를 갈구하는 자들이다. 예수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마태복음 5장 3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누가복음 6장 20절)”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심령이 가난해야 신의 말씀에 겸허하며 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세상에 덕을 베풀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의지를 천사에게 맡길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장 23절-24절)” 라고 한 것 역시 부자는 재산은 있지만, 심령이 가난하지 못해 덕을 베풀기 힘들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리라. ‘가난하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마련해 주는 잠자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허락하는 천국의 문이다. 

 

제4연에서 “죽음은 신들의 영광, 신비로운 다락방, 가난한 사람의 재산, 오래된 고향, 미지의 천국으로 열린 문!”이 되었다. 단테의 신곡에 비유하면 비로소 연옥을 지나 지고천에 이른 것이다, 이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천국에 도달했다. 진리의 말씀에 갈구하고 시를 갈구하는 자들이 고난을 이겨내고 덕을 베푼 결과 다가온 축복이다. 그것은 현세엔 결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진리와 시에 충실한 자는 현세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천국에선 신들의 잔치가 벌어진다. 그렇기에 “죽음은 신들의 영광”이 된다. 그리고 그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신비로운 다락방”인 천국의 방이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값진 재산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고향”이다. 그러기에 “죽음은 미지의 천국으로 열린 문!”이 될 수 있다. 

 

죽음이 천국에 이르는 문이고 휴식이며, 영광이고 축복이 될 수 있음은 가난한 심령으로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리를 실천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가난하지만 고귀한 영혼을 가꾸고 지킨 사람들의 몫이다. 이 시는 겉으로는 죽음을 예찬하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현세에서 진리에 충실한 삶을 갈구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시인은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심령이 가난하게 살아가야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 같다. 

 

다시 서두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4명의 죽음을 생각한다. 첫 번째는 가난한 60대 노인의 죽음이다. 서울 강서구 한 임대 아파트에서 67세 노인이 홀로 세상을 떠났다. 노인의 죽음을 의심하고 알린 사람은 우유 배달원이었다. 우유 배달원은 ‘대문 앞에 자꾸 우유가 쌓여가는 것을 보고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을까’하는 걱정으로 신고를 했다. 출동한 소방관에 따르면, 그 노인은 숨을 거둔지 일주일 이상이 지났다. 그는 기초생활 수급자였다. 우유 배달원의 관심이 없었다면 시신은 더 오래 방치되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웃에 무관심한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행히 따뜻한 심령의 가난한 우유 배달원이 있었기에 주검은 발견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현대건설에서 뛰었던 여자 프로배구 선수였던 고유민(25세)의 자살 소식이다. 그녀의 죽음을 확인한 경기 광주경찰서에 따르면 고유민은 전날 오후 9시 40분경 광주시 오포읍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외부인의 침입을 비롯한 범죄 혐의점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대구여고 출신으로 레프트 포지션의 고유민은 2013∼2014시즌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로 현대건설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통산 7시즌 동안 154경기 401세트 193득점(공격성공률 26.76%)을 기록했다. 그런 고유민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리그가 중단되기 전인 3월 개인적인 사정으로 팀을 떠났고 구단은 5월 고유민을 임의탈퇴 처리했다. 고유민은 생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악플에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5월에도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제 팬도 아니신 분들이 저한테 어쭙잖은 충고 같은 글 보내지 말아 달라. 남일 말고 본인 일에 신경 써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는 ‘제발 악플 좀 그만 달라’는 하소연을 했다. (동아일보 2020.8.1.) 그녀가 구단을 그만두었을 때 구단 측뿐 아니라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그리고 일부는 악플로 그녀를 공격했다. 모두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악플이 넘치는 세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플로 무자비하게 인격을 살해하는 세상,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예단하고 공격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진리와 성찰보다는 이기적 감정과 어긋난 재미(?)에 충실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살벌하다. 하나님의 성전을 찾고 부처님 앞에서 합장하는 사람은 많지만,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자들이 부족한 세상이다. 우린 모두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간다로 건너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삶의 전부를 쏟아붓는 우간다의 어머니, 케이티 데이비스(Katie Davis)의 “20억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굶주린 한 명씩만 책임진다면 세계의 기아는 사라질 것이다(케이티 데비이스, 정성목 역,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두란도 서원)” 말을 새겨야 할 것 같다. 악플이 아닌 선플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선플도 마음이 가난해야 달 수 있다. 

 

세 번째 친구의 죽음이다. 그는 공직을 정년퇴직하고 3년째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암이 그를 덮쳤다. 문병 갔을 때 그는 살고 싶은 욕망이 강했지만 1년 반을 암과 투병하다가 끝내 이기지 못했다. 그는 40년 가까운 공직 생활 중에 내면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 같았다. 스트레스도 내려놓지 못함이다. 내려놓을 때 유쾌한 삶이 다가온다. 내려놓을 수 있음은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일이다. 그는 종교재단이 마련한 묘지에 묻혔다. 죽음으로 신의 나라에 간 것 같다. 꼭 그러길 바란다. 

 

네 번째는 기도 중에 잠자듯이 죽음을 맞이한 지인의 이야기이다. 그는 80을 갓 넘긴 노인이었다. 5년 전 고관절이 부러져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났지만, 거동이 불편했다. 같은 시기에 부인도 대장암으로 한 병원에 입원하여 서로 의지하면서 투병하여 완치되었다. 그 후 둘은 생명을 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 3번 식사가 끝나고 나면 찬송과 기도를 했다. 그의 생일날이었다. 자손들이 모두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을 먹고 부부는 여느 때처럼 찬송과 기도를 올렸다. 기도 중에 그는 잠이 들었다. 가끔 있는 일이라 부인은 남편이 자는 줄 알았다. 잠시 후에 들어 온 아들이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고 앉아 있다고 하며 확인한 결과 숨이 멎은 것이었다. 기도 중에 조용히 숨을 거둔 것이다. 극히 드문 죽음이었다. 축복이었다. 유가족들도 슬픔 속에 축복했다. 

 

에로부터 좋은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고종명(考終命)이라 하여 오복(五福)의 하나라고 여겼다. 많은 사람이 아픔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이는 식물인간으로 연명 치료를 하다가 죽는다. 어떤 이는 중풍과 치매로 살다가 죽는다. 이런 죽음에는 본인과 가족 모두 괴롭다. 그래서인가? 항간에는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는다)라는 말까지 돈다. 건강한 삶과 장수와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열망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고종명(천명을 다하고 고통 없이 자는 듯 죽는 것)을 맞이하려면 3대를 걸쳐 덕(德)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3대에 걸쳐 덕을 쌓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네 번째와 같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신의 축복이란 말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가난하다. 가난해야 한다. 특히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죄를 짓고 형장에서 죽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탓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베풀 수 있는 자이다. 미국의 석유왕 존 데이비드 록펠러(John D Rockefeller 1839〜1937)는 33세에 100만 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으며, 53세에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55세에 불치의 병에 걸려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고 절망했다. 그때 병원 벽에 걸린 액자에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행복하다.”는 글귀를 읽고 자선을 베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98세까지 살다 죽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인생 전반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천명을 다하고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우유 배달원이 발견한 홀로 죽음을 맞이한 가난한 노인도, 악플 등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한 고유정도, 암과 투병하다 죽음 친구도, 기도 중에 죽은 지인도,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이 ‘신들의 영광인 신비로운 다락방, 오래된 고향’인 ‘미지의 천국으로 열린 문!’으로 들어가길 바란다. 죽음이 신들의 영광이고 축복이 수 있음은 삶이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 《가난한 이들의 죽음》을 읽으며 삶과 세상을 성찰해 본다. 그리고 더욱 가난한 마음으로 진리에 충실하게 살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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