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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경계》하는 삶을 살지 못할지라도

이상호 | 입력 : 2020/11/13 [16:1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천안아산경실련대표=이상호] #1 “삶의 무게도 가수로서의 무게도 무거운데 가슴에 훈장까지 달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예술인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2 “KBS가 이것저것 눈치 안 보고 정말 국민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3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 세월에 끌려가는 거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안 가본 데 한번 가보고 안 하던 일을 하셔야 세월이 늦게 갑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는 세월의 모가지를 비틀어서 끌고 갈 겁니다.” 

 

위의 말들은 2020년 9월 30일 KBS에서 방송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가수 나훈아가 공연 중에 한 말이다. 그는 2시간 40분간 홀로 진행하는 공연에서 고향, 사랑, 인생 등의 주제로 29개의 히트곡과 신곡을 불렀다. 15년 만의 방송 출연이라는 이 공연은 클래식, 포크, 헤비메탈, 국악, 사물놀이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여 트로트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경지를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다. 

 

시청자들은 그가 출연료 한 푼 안 받고 자진하여 공연한 이유가 코로나로 힘든 국민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에도 감동했다. 특히 그가 스스로 작사 작곡한 신곡 “테스형!”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처지를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동원하여 잘 대변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테스형!”은 노래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데 정치인과 정당은 나훈아의 공연과 말을 저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해석하며, 그의 공연 인기와 말에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자기와 자기 당의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위에 언급한 나훈아의 말 중에서 가슴에 파고든 것은 첫 번째(#1) 말이었다. 나훈아는 국가에서 예술인에게 주는 훈장을 거부했다. 남북 예술교류 때 가수들이 북한 공연을 너도나도 기획할 때, 그는 북한이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노래를 못 부르게 하며 간섭하는 것이 싫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또 군사정권 시절, 권력에서 부를 때도 거절했으며, 노래 2~3곡만 불러도 수천만 원을 준다는 재벌의 부름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오직 관객 앞에서만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권력과 공(功)에 초연한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나훈아가 한 앞의 말은 <#3의 말>과 같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3의 말>은 그 누구에게도 끌려가지 않는 생각과 행동과 생활이 자유로운 삶, 오로지 자기 주체적인 삶을 향한 예술가의 자존심이라 여겨졌다. 그런 삶을 위해 그는 <#1의 말>을 실천했으며,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2의 말>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은 사소한 공도 자랑하고, 훈장을 받으려 애를 쓰는데, 나훈아의 이런 말과 삶을 보면서 떠오른 시가 있었다. 박노해의 《경계》였다. 

 

《경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박노해 제3시집 『겨울이 꽃핀다』, 해냄, 1999, 121쪽 

 

시(詩)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나는 박노해의 《경계》를 시라고 생각한다. 한 줄씩 4연으로 된 이 시는 자신과 세상을 향한 다짐이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선언이다. 시 한줄 한줄에 자기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경계》는 박노해가 7년 6개월의 수감 생활 끝에 김대중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1998년 석방된 후 1999년 12월에 나온 첫 시집 『겨울이 꽃 핀다』(해냄)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집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박노해를 변절자, 전향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전향은 변절이 아니라, 삶의 완숙에 이르는 길이고, 삶의 전환이며, 자기완성을 향한 구도의 길이라 여겨진다. 

 

시 《경계》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대목은 첫째 연의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이다. 세상에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과거를 팔아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까지 살려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 과거가 자기 노력에 의한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이라면 그래도 좋으련만 조상의 덕에 혹은 자기가 이룩한 공은 별로 없으면서 타인의 공을 자기화하고 그 공의 등에 업혀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내세우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박노해가 말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에는 삶에 대한 성찰과 결심이 담겨 있다.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청산하려고 해도 청산되지 않는다. 과거의 숱한 사연, 공(功)과 과(過)는 기억하고 성찰할 뿐이다. 과거의 그 흔적은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는 기억의 저장고에서 침전(망각)되었다가도 다시 솟아나는 것이다. 과거는 깊은 창고에서 햇빛을 보지 못해 탕이 나버린 종이처럼, 층층이 쌓인 역사의 더미에서 찾아낸 먼지 덮이고 주름진 것들이지만, 그것을 성찰할 때, 우리를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미래로 안내한다. 그래서 과거는 청산하려 해도 청산되지 않는 삶의 흔적이며 ‘경험의 주름’이다. 그래서 과거는 성찰하며 오늘을 새롭게 하고 내일을 여는 것이지 청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나는 박노해의 《경계》를 그렇게 해석하고 그의 삶에서 그런 것을 발견했다. 

 

제2연의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에 얹혀 오늘을 살면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게 된다. 과거의 업적을 내세우며 현실의 삶에 사기(?)를 칠 수 있고 오늘을 안일하게 살 수도 있다.(사실 과거에 얹혀 그 자랑과 혜택으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많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현실은 자기 자각과 노력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할 시간이며 공간이다. 만약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려고 하면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게 되어 있다. 오만해질 수도 있고, 안일해질 수도 있다. 미래를 향한 현실은 열심히 일하며 정진해야 할 뿐이다. 

 

그런 삶의 자세는 3연과 4연의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에서 구체화 된다. 앞에서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대상’이라고 한 것은 과거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 성찰을 통해 오늘과 내일을 새롭게 가꾸게 하는 바탕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되, 미래를 말하며 그 과거를 흙더미 속에 묻어 두어서도 안 된다. 이를테면 최근에 붉어진 일제 청산의 문제를 두고 볼 때, 일제는 청산되지 않는 과거이다. 그 과거는 이미 이 땅에 존재했던 것이고,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다. 그것이 어떻게 청산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반론자들은 미래를 위해 그것들을 묻어 두자고 한다. 그러나 과거는 묻어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묻어 두는 것은 미래를 흐리게 하는 일이다. 과거란 역사는 성찰을 통해 곱씹으며 오늘의 바탕을 만들고 미래의 비전을 창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이라고 한 것에는 모든 것이 오늘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은 과거의 연장선이며 내일의 가교이다. 따라서 과거를 팔아 살아서도 안 되고 미래를 내세워 오늘을 게을리하거나 사명을 흐려서도 안 된다. 단지 오늘에 충실하여야만 한다. 오늘에 충실하기 위해선 과거를 팔아서도 안 되고 과거를 묻어 두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오늘은 흐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과거는 지난 시간의 흔적이다. 그 시간은 생명력이 있어 늘 되살아난다. 되살아나는 과거는 끊임없는 성찰로 오늘을 더욱 경건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내일을 향한 비전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때 과거는 경건하고 비전 있는 삶의 빛과 향기를 준다. 

 

내가 박노해를 안 것은 1986년 가을이었다. 그를 만나본 일도 없고, 그의 노동 투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어느 모임에서 안 그의 시집 『노동의 새벽』을 사서 읽으며 그에 빠지기도 하고 비판도 했다. 그의 노동운동에 생각을 공유하면서도 그의 사상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그의 시 일부는 시라기보다 선전문이고도 여겼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에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1989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1991년 체포되어 숱한 고문을 당한 후 사형이 구형되었고, 무기 징역에 처해졌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경주 남산 자락에 자신을 묻고(그의 시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 쓴 시집 『참된 시작』을 통해 박노해의 고행과 새로운 삶을 향한 다짐을 보았다. 그는 분명 『참된 시작』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고 새로운 사상과 삶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7년 출소 직전에 출간한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통해 그의 삶이 새로운 이정표를 찾아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2000년 초에 7년 6개월간의 수형 생활을 끝내고 출소한 후 낸 첫 시집 『겨울이 꽃 핀다』를 읽으며 박노해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박노해의 모든 시집을 사서 읽으며, 과연 그가 시 특히 《경계》에서 말한 것처럼 살 것인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는 시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는 뒷날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시 《경계》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면서 국가 보상금을 거부하였으며, 권력과 정치의 길도 거부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나눔 문화>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에 뛰어들어 가난과 전쟁의 현장에서 평화를 갈구하는 목소리를 담아내었고, 그것을 흑백 사진으로 남겼다. 그 기록 사진전을 2010년 <라 광야>전과 <나 거기에 그들처럼>전을 개최하여 사람들에게 알렸고, 2012년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다. 이 시집의 시들은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사랑한다.

 

그 후 지금도 그는 전 세계 분쟁지역과 빈곤 지역, 지도에도 없는 마을을 두 발로 걸으며 그들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소통하며 아픔과 사연을 시와 사진으로 전한다. 그는 분명 지구별 여행자이며, 유랑자이다. 그의 여행은 나눔과 소통과 고발과 성찰과 구도의 여행이다.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의 여행 기록인 『다른 길』(2014)은 그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최근에 나는 박노해의 사진 에세이 『길』을 읽는다. 박노해는 지금도 지구 곳곳의 험한 곳을 누비며 그들과 소통하고 아픔을 나눈다. 나는 그가 걷는 길을 보면서 걷는 자의 고뇌와 소망과 아름다움을 본다. 그는 말한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박노해, 『길』 서문“길은 걷는 자의 것이다”에서) 길을 걷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길은 자기 힘으로 걸어야 한다.

 

시인이 말한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을 다시 곱씹어 본다. 그리고 역사와 현실을 본다. 정치적으로 공(功)이란 것이 정권을 위한 공이었지, 나라와 백성(국민)을 위한 공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우린 공신(功臣), 유공자(有功者)라는 이름으로 우대하는데 그 안에는 진짜 유공자도 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유공자도 많다는 생각이 들면 씁쓸해진다.

 

우리 역사에서 공신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후 “삼한공신‘이란 작호를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공신은 조선 시대에 와서 끊임없이 책봉되었다. 그래서 조선을 공신의 나라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후에 준 개국공신에서부터 후세 왕들은 일이 있을 때마다 공신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구국(救國) 공신이라기보다는 정권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기여한 공신이 대부분이었다. 그때마다 역사는 위기에서 소용돌이쳤다. 그 누란의 위기를 좌초한 원죄는 그들 정치집단에 있었음에도 공도 그들이 나눠 가졌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28회 천여 명이 넘는 공신이 책봉되었는데 그 종류도 다양했다.

 

공신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선조 때의 공신이다. 선조 때는 나라도 처참했지만, 광국공신, 선무공신, 평난공신, 호성공신, 청난공신 등 공신도 많았다. 그중에서 호성공신은 왕이 피난할 때 의주까지 호송한 사람들에게 준 공신인데 86명이다. 그중에는 내시 24명, 마의 6명, 의관 2명, 별좌 및 사알(왕명 전달)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선조의 호송과 왕실보전에 공을 세운 이들을 찾아 무려 2,475명을 별도로 호성원준공신이란 작호를 주었다. 그러나 왜란의 평정에 직접 나아가 목숨을 건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1604년 10월 27일 선조가 밤중에 신하들을 불러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라는 잔치를 벌였다. 초청대상은 그때까지 살아있는 역대 공신 63인데 실제 참석자는 58명이었다. 불참자는 류성룡, 정탁, 이운룡, 이산해, 남질이었다. 류성룡은 3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과 권율, 김시민을 추천했고, 정탁은 옥에 갇힌 이순신을 변호했던 인물이며, 이운룡은 이순신 아래서 전투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모두 늙어서, 아파서, 상중(喪中)이라고 변명했다. 심지어 류성룡은 자기가 받은 공신 책훈을 취소해 달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목숨 걸고 싸운 정인홍, 김면,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조헌 등 의병장들은 누구도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중에 벌어진 이몽학의 난에 연류되었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했다. 살의(殺意)를 느낀 홍의장군 곽재우는 초야에 숨어 버렸다. 호성공신 1등에 책훈되었던 전(前) 영의정 이항복은 “의리상 피해 달아날 수가 없어 그저 걸어서 수행했을 뿐,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세운 공에 비해 무척 부끄럽다.”며 공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했다(1602년 7월 24일 『선조실록』) 그의 절친 영의정 이덕형도 “의병을 일으키고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내가 끼는가”라며 서훈 철회를 요청했다(1603년 7월 4일 『선조 실록』) 선조는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덕분이었다. 조선 장수들은 그저 명나라 군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요행히 잔적의 머리만 얻었을 뿐이다”고 하면서 왜란을 물리친 모든 공을 명나라와 선조 자신 그리고 호성공신에게 돌렸다. 그런데 수사반장이던 정철이 1,000여 명의 선비들을 도륙 낸 기축옥사의 원인이 된 정여립의 난을 평정한 후 책봉한 평난공신이 무려 22명이나 되었다. (박종인 『땅의 역사1』,상상출판, 이기환, 《흔적의 역사》,“선조는 왜 마부에게 공신 작위를 내렸을까”) 모두 서인들의 밥그릇이었다. 이쯤 되면 공신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힘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현직에 있으면서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뒷날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직을 잃었다. 지금도 공신에 해당하는 국가 유공자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두고 명단을 공개하란 요구도 일고 있지만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군에서 작전 중에 죽은 이들의 공이 그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그런데 최근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민주당과 친여 무소속 의원 20여 명이 발의한 “민주화운동 배우자와 자녀에게 장학금과 취업 혜택을 주자”는 취지의 [민주화운동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이 입법 예고 기간이 만료되고 조만간 국회에서 심의될 예정이란다. 그래도 될까?

 

박노해가 시 《경계》를 다시 새겨본다. 박노해가 누구인가? 민주화운동, 한국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사상가이며,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혁명가였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면 그에 비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초연하게 그 공을 거부하면서 오늘을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그의 시 《경계》를 가슴에 새기며 오늘을 살았으면 참 좋겠다. 정치가가 공에 눈이 어두워지면 역사를 흐리게 한다. 비록 《경계》하는 삶은 아니라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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