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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그리는 느린 삶에의 동경

이상호 | 입력 : 2021/01/11 [11:2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코로나 19가 세상을 멈추게 했다. 세계 각국은 나라 간의 이동까지 차단해 왔다. 우리나라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생활화하면서, 영업 중지와 이동 자제를 반복해 왔다. 겨울이 오면서 다시 기승을 부린 코로나 19는 연말연시와 새해맞이를 얼어붙게 했다. 강화된 코로나 대책으로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초강수의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수많은 영업장이 행정명령으로 문을 닫았다. 그들은 생존권을 위협받는다면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강제 멈춤에 대한 항의였다. 강제 멈춤은 생존권의 강제 위협이 되었다. 

 

영국에서부터 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변종 바이러스가 확산하며 위협을 가한다. 우리나라도 올해 안으로 모든 국민에게 백신 접종을 완료할 것이라 한다. 멈춘 세상이 다시 꿈틀거릴 것이란 기대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아직 코로나 19는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변종 바이러스가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한다. 확산하는 변종 바이러스까지 잡지 못하면 내일도 장담할 수 없다.

  

새해 초부터 내린 많은 눈도 세상을 멈추게 했다. 모두 느린 걸음이다. 새해 시작부터 코로나 19와 눈으로 멈춤이 연장된 세상이 되었다. 일상을 멈췄고 느리게 했다. 상당 부분은 후퇴하게도 했다. 자영업자들과 하층민들의 삶은 멈춤을 넘어 파괴되어 가고 있다. 최대의 위기다. 

 

모든 생명체의 생활은 움직여야 생존하고 성장한다. 멈추거나 지나치게 느리면 생명력을 위협받고 심해지면 생명을 잃게 된다. 특히 창조적 문명에 묻혀 사는 인간은 멈추거나 느림이 계속되면 큰 문제를 일으킨다. 그 멈춤과 느림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일 때 더욱 큰 위기를 초래한다. 지금이 그 큰 위기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떠올린다. 멈춤과 느림에 대해 생각해 본다. 멈춰버린 세상에서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축적할 때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위기에서 의기소침하고 불평불만으로만 치달을 때 더 강한 스트레스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금의 이 위기에서 정부가 무조건 멈추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멈춤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문명의 긴박한 속도 속에 살아 온 우리는 가끔 멈춤과 느림을 예찬하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멈춤과 느림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멈춤과 느림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속도 경쟁에서 잠시 멈춤과 느림을 그리워하고 예찬했듯이, 이 강요된 멈춤과 느림의 위기에서 코로나 19가 멈추는 날을 대비하는 성찰과 발견, 도전의 기회로 삼아봄은 어떨까? 그동안 빠르게만 달려온 삶에 대하여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지나온 삶을 성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장석주의 시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1955〜 )-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지붕 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용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장석주 시집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속도와 욕망 중심의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 느린 삶을 동경하는 시(詩)이다.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문명의 수레바퀴에서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고즈넉한 삶을 한 번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상상으로만 그런 삶을 꿈꾸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때로는 삶과 문명이란 것이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기도 할 것이다. 

 

시는 짧고 단순하며 고요하다. 고즈넉한 시골 저녁 풍경을 보면서 그린 한 폭의 동양화다. 그 풍경을 보면서 마음에 출렁이는 ‘지금까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강한 동경을 드러낸다. 저녁 풍경은 그 자체가 감탄사이다. 

 

총 3연으로 이루어진 시의 첫 연은 저수지가 있는 산골 고즈넉한 외딴집의 저녁 풍경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다. 우린 과거부터 동양화에서 이런 풍경을 많이 보아 왔다. 상상해 보자. “땅거미 내릴 무렵”이니 저녁때다. 집은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에 있는 “외딴 함석지붕”의 집이다. 그러면 화자는 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함석지붕의 집과 반대편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 집이 “외딴 함석지붕”의 집이니 오래되었다. 여기서 시인은 그 함석지붕의 집을 문명이나 타인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고요한 삶의 공간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문명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묶은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순박하게 삶을 이어오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의 삶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흩어진다.” 아마 저녁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저녁밥을 짓고 있음은 노동의 멈춤이고 휴식의 신호이고, 비로소 가족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내일을 위한 충전재들이다. 한편으로 보면 평화롭고 한편으로 보면 외롭다. 

 

제2연은 그 저녁연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의 마음에 비친 그 저녁연기는 단순하고, 느리고, 고요하다. 실제로 옛날 산골짝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는 단순하고 느리고 고요하게 산허리를 감아 돌며 하늘로 오른다. 옛날 농촌에서 살아 본 사람에게는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이 표현이 마음을 붙잡는다. 우린 지금까지 너무 복잡하고 빠르고 시끄럽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습은 감탄사가 된다. 

 

제3연에서 “오, 저것이야!”가 바로 그 감탄사이다. 왜 감탄했을까? 그것은 시인이 아직 살아보지 못했지만 매우 동경해 왔던 삶 즉 ‘느림의 삶’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으로서는 대단한 자기 발견이다. 이제까지 자기가 꿈꾸어 온 삶이지만 무의식의 저편에 있다가 갑자기 의식으로 솟아난 욕망이다. 그것이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 시의 모든 것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시의 절정이면서 감탄할만한 욕망의 분출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린 엄청난 속도 경쟁의 시대를 살아왔다. 한때는 ‘속도가 경쟁력이다.’라는 말이 우리를 지배해 왔다. 지금도 속도에 뒤지면 세상살이에서 밀려난다. 그런 속도의 삶에서는 자기 자신도 속도에 묻혀 버릴 수 있다. 시를 읽으면서 고향 생각이 왈칵 난다. 산골, 고향 마을의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여름밤에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하늘을 보며, 별을 헤아리고, 별을 따라가고, 별과 속삭이던 어린 날의 상상과 동경이 나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한다. 분명한 것은 속도 경쟁에선 그런 상상도 동경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시속 100km가 넘게 질주할 때는 운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운전대만 잡고 앞만 보아야 한다. 아차 하다간 사고를 낼 수 있다. 질주하는 속도에서 맞이하는 사고는 죽음을 초래한다. 그러기에 속도 경쟁에서는 사색과 세심한 관찰이 개입될 수 없다. 우린 고속도로를 달릴 때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 속도 경쟁의 삶에서는 자신도 돌아볼 수 없고 타인도 돌아보기 어렵다. 가족도 자녀도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또 속도에 삶을 맡긴다. 그런 가운데 마음은 더 바쁘고 긴장은 고조된다.

  

삶을 돌아보면 우린 무한 경쟁 시대에 무한 속도 경쟁을 해 왔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갖는 엄청난 경쟁 부추김과 무한 소비의 강요였다. 그것은 인간의 무한 욕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무한 욕망은 무한 소비자본주의를 낳고 그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했다. 과거에는 근검과 절약이 미덕이었지만, 무한 소비자본주의 시대는 그것을 낡은 도덕률이라면서 단두대에서 처단했다. 그러나 인간의 무한 욕망이 만들어낸 무한 소비자본주의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무한 소비의 부산물인 폐기물과 지구환경의 오염이다. 지구는 치유하기 힘든 병을 앓고 있다. 그리고 소비는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강한 촉매제가 되었다. 소비가 없으면 자본주의는 멈추고 몰락하고 자본주의적 삶도 멈추고 몰락하게 된다. 

 

또 지금까지 인류는 문명화란 이름으로 속도를 동경해 왔다. 그래서 문명은 곧 속도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린 광속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속도는 느림을 딛고 서며 멈춤을 전제로 한다. 가끔은 멈추어 서서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살펴야 한다. 멈출 줄 모르는 자동차는 죽음으로 이끈다. 멈추어야 하고 점검도 해야 한다. 느림은 멈춤을 위한 전 단계이자 속도의 전 단계이기도 하다. 느림과 멈춤은 다시 속도를 얻기 위한 충전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속도와 느림, 속도와 멈춤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우리가 느림의 시대인 전통사회에서 속도를 동경했듯이 속도의 시대에선 느림과 멈춤을 받아들여야 한다. 

 

속도에 중독된 사람은 느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멈춤은 더더욱 갑갑한 일이다. 민식이법(<도로교통법> 일부개정법률,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이 통과되면서 도심뿐 아니라 농산어촌 지역도 속도가 엄청나게 줄었다. 강제적으로 속도를 줄인 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고 도로에서 속도를 30km 이하로 줄어야 하자. 어떤 이가 갑갑하게 30km가 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 난 유럽은 20km 이하인 나라도 많다고 했다. 길거리에 붙은 “속도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란 문구의 현수막은 단순한 표어가 아니다. 속도에선 자기도 못 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도 못 본다. 속도에 중독된 사람이 그 말의 의미를 새겼으면 좋겠다.

  

선(線)에 비유하면 느림은 곡선의 길이지만 속도는 직선의 길이다. 고속도로는 거의 직선으로 만들어졌고 시골길은 거의 곡선이다. 고속도로는 낭만이나 사색이 없고 마음대로 멈출 수 없지만, 시골 곡선 길은 낭만과 사색이 있다, 마음대로 멈출 수도 있다, 직선의 삶은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이고 멈춤이 함부로 허락되지 않는 삶이지만, 곡선의 삶은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고 멈추기 쉬운 삶이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삶은 자신이 병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가족이 아픈 줄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곡선의 삶은 자신과 가족을 돌아볼 줄 아는 삶이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문이당, 1996)에서 아버지인 한정수는 정신없이 속도의 삶을 살아 고위직이 되었지만 결국 얻은 것은 췌장암이었다. 뒤늦게 돌아보니 아내와 자녀가 보였다. 화해했다. 느린 삶을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만약 그가 일찍부터 느린 삶을 틈틈이 가졌다면 삶을 그렇게 마감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화에서도 느린 대화가 요구된다. 느림의 대화는 은유와 비유가 깃든 대화이다. 미소와 여유가 있는 대화이다. 양보가 있으며 기다림이 있다. 그런 대화에는 치유가 깃든다. 그러나 빠름의 대화는 직유이다. 직문 직답을 해야 하고 직설적이다. 미소와 여유가 아니라 빠른 결론을 내야 한다. 양보가 아니라 설득하고 이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인내와 기다림이 없다. 그런 대화에는 상처가 많아진다. 현대인에게 상처와 스트레스가 많은 것도 빠른 직유의 대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시(詩)도 빠름 속에선 탄생하지 않는다. 느림이 있어야만 탄생한다. 시학(詩學)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비극의 자궁에서 태어난 창조적 산물”이라고 했듯이, 느림은 빠름이란 ‘비극의 자궁’에서 태어난 창조적 성찰인지 모른다. 빠름이 있기에 느림이 가치가 있으며, 느림이 있기에 빠름을 동경한다. 그리고 시(詩)도 빠름이란 비극적 자궁에서 느림이란 창조적 성찰을 먹고 태어난 아기인지 모른다. 느림의 시간을 갖는 것은 장석주 시인이 말했듯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자신을 꼼꼼히 살피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그의 시가 탄생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장석주 시인은 “속도에선 사색할 수 없다”고 하면서,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느린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자신의 내면을 고요하게 만들고 거기에 침묵과 명상의 나이테가 그려지게 해야지요.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걷는 일상, 나눔을 베풀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삶! 느림은 현대인이 조급한 욕망들을 유연하게 만들고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장, 현실에서 결핍된 갈증을 해결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니까요.”(김명원『시인을 훔치다』 지혜, 2014. 292쪽)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사유, 무슨 명상, 배부른 소리하네.’ 그러나 우린 사유와 명상은 속도 속의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청량음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명상센터엔 치열하게 속도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넘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가치가 있으며 어둠 또한 밝음이 있기에 가치가 있다. 만약 세상에 밝음만 있으면 휴식과 위안을 가질 수 없고 어둠만 있으면 성장과 유희도 없다. 밝음은 활동과 성장의 동력이지만 어둠은 휴식과 창조의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녁이 있는 삶은 중요하고 저녁 풍경은 고요와 평안을 준다. 이 시가 추구하는 것은 속도 중심의 욕망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느림의 미학이 깃든 삶이다. 그러나 느림이 혼자 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느림도 속도가 있기에 미적 가치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속도와 느림은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에 속도 속에 살다 보면 느림의 삶이 필요하고, 느림 속에 살다 보면 속도를 동경하고 추구한다. 속도는 삶의 역동성과 성장을 가져오고 느림은 삶을 성찰하게 하고 내실을 구하게 한다. 

 

변증법적 발전 법칙으로 보면 빠름과 느림은 정(正)과 반(反)의 관계다. 빠름이 정이라면 느림은 빠름의 반이다. 나아가 빠름 또한 느림의 반이 된다. 이 정과 반의 상호 부정의 상승적인 연속에서 새로운 합(合)이 창조되어 간다. 그래서 역사는 발전한다. 시도 태어나고 삶도 충실해진다. 무한 속도의 빠름 속에 주어진 느림은 때로는 창조적인 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에겐 코로나 19가 원하지 않는 느림 삶을 강요했다. 우린 무한 속도에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느린 삶에 갇혀있다. 속도 속에 살다 보니 느림은 너무나 갑갑하고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이 갇혀있는 멈춘 삶, 서 있는 듯한 느린 삶도 주어진 운명인지 모른다. 화를 낸다고, 밖으로 뛰어나간다고 해결될 것은 아니다. 우리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속도 속에 뛰어들 수 있다. 강제화된 멈춘 삶, 원하지 않은 느린 삶에 화를 내다 지치고 지면 다시 찾아오는 속도에 적응할 수 없다. 내공을 키워야 한다. 

 

이 힘든 시기에 사람들이 장석주의 시《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를 읽으며 원하지 않았는데 닥쳐온 멈추어버린 듯한 느린 삶 속에서 시인이 추구했던 ‘느린 삶’의 원형질을 새겨보았으면 좋겠다. 느린 삶이 인생에 주는 미학적 가치를 새기고 지나간 시간 속에 침전된 삶의 주름들을 차근차근 살피며 다시 다가올 속도의 내일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위기가 새로운 기회를 창조해 낼 수 있으리라. 나도 지나간 시간의 주름들 틈에 쌓인 것들을 꺼내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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