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시(詩)로 세상 읽기]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들어봐요

이상호 | 입력 : 2021/02/10 [09:42]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입춘이 지나고 설날이 다가온다. 전통 명절인 설날은 입춘과 가까이 있다. 그것은 설날이 겨울의 한가운데인 양력 1월 1일이 아니라, 음력 1월 1일이라 양력보다 약 1개월 정도 늦은 봄의 길목에 있음을 말해 준다. 

 

서양 문명이 세상을 지배한 지금은 양력 1월 1일에 새해맞이를 하면서 해맞이 장소가 북적거렸지만, 전통적인 설날은 그 의미가 날이 갈수록 퇴색되어 갔다. 올해의 1월 1일 해맞이는 코로나 19로 썰렁했다. 설날은 더 썰렁할 것 같다. 정부가 코로나 19 때문에 5인 이상 집합 금지, 조용한 설 보내기, 고향 방문 자제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설날을 떠올린다. 온 가족들이 모여 북적거렸다. 양력 1월 1일과는 달리 새해맞이를 집안에서 했다. 설 전날부터 외출을 삼가고 가족들과 지내며 한해를 성찰하고 정리했다. 설날에는 아침 일찍 세수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덕담에는 복된 삶을 위한 주문과 행동지침도 담겨 있었다. 그 시간은 행복과 덕행을 위한 작심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설날은 계절적으로 입춘을 전후한 봄의 길목에 있듯이 희망과 목표를 향한 자기 의지를 다지는 날이기도 했다. 설날이 봄의 길목에 있다는 것은 봄은 희망과 목표를 설계하는 계절인 것과 통한다. 

 

나의 올해 설날은 너무 쓸쓸할 것 같다. 가족이 모이지 않는다. 모이면 5인 이상이니 모일 수가 없다. 대신 설날 아내와 서울에 혼자 사는 아들에게만 다녀올 계획이다. 올해 겨울은 너무나 집요하게 추웠다. 눈도 전보다 많이 내렸다. 기온으로만 추웠던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모두 추웠다. 코로나 19는 겨울이 오면서 더욱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혔고 많은 사람이 코로나 와 싸우며 기약 없는 생존 투쟁에 나서야 했다. 코로나 19는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 주지 않기 위해 악을 쓰듯이 우리에게서 물러가지 않기 위해 집요하게 악을 쓰고 있다.

  

아내와 산책을 했다. 바람은 차지만 햇살이 제법 따뜻해졌다. 길가의 풀들이 푸른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무들을 만져 보았다. 물기를 머금고 생기를 발하고 있었다. 코로나 19로 삶은 갈수록 척박해지고, 자영업자들은 출구 없는 생존투쟁을 하지만 ‘폐업 난민’이 늘고 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일자리는 줄어들고 대기업들까지 정시 채용을 없애고 수시채용으로 바뀌어 취업 문은 더욱 예측할 수 없고 좁아지는데,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젊은이들은 영혼까지 끌어들여도 집을 사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봄은 오고 있었다. 봄의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희망의 봄이 오고 있어요.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고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해요. 힘들어도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들어봐요” 

 

집에 돌아와 오세영의 시집을 꺼내 그의 시 <나무>를 읽었다.

 

 

나무 1

 

                                 오세영 

새해 첫날 

막 잠에서 깨어나면 

창밖 나무들의 

함빡 

물오르는 소리 

처녀가 이미 처녀가 아니듯 

오늘의 나무는 이미 어제의 나무가 

아니다 

새날이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아라 

어제의 나무가 오늘의 나무가 아니듯 

거기 

너를 바라보는 또 다른 

 

 

- 오세영 시집『시간의 쪽배』(민음의 시 128, 민음사, 2005)-

 

평화와 희망,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 봄을 기다리며 봄을 찬양하는 시인 오세영의 시 《나무 1》이다. 그의 시집 『시간의 쪽배』에는 《나무 1》 《나무 2》 《나무 3》 이렇게 나무를 제목으로 한 시가 시리즈로 실려 있다. 위의 시는 그중 첫째 시인 《나무 1》이다. 

 

오세영의 시를 읽다 보면 감성의 내밀한 상상 속에 이성을 강하게 품고 있음을 느낀다. 그 이성은 평화와 사랑, 희망을 향하고 있다. 위의 시 《나무 1》도 그렇다. 위의 시 《나무 1》에서도 새해 첫날 나무를 보고 느끼는 감성이 상상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희망과 다짐, 성장과 변화를 향한 이성적 사고가 숨어 있다. 이것은 감성으로나 이성으로나 확 치우쳐야만 시의 느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어떤 이들의 주장과는 배치되지만, 어쨌든 나는 감성과 이성의 균형을 찾아가려는 그의 시를 좋아 한다.

  

시인은 새해 첫날도 막 잠에서 깨어나 평소처럼 창밖의 나무들을 바로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과는 달리 창밖 나무들의 ‘함빡 물오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소리는 실제 소리가 아니라 감성의 소리였다. 심장의 소리, 심연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인은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 것이다. 

 

그런데 “새해 첫날”은 언제였을까? 시에서는 “새해 첫날”이 양력 1월 1일인지, 음력 1월 1일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새해 첫날”을 음력 1월 1일로 생각한다. 그 첫날이 설날이라야 ‘나무에 함빡 물이 오르는 소리’ 즉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력 1월 1일이라면 추위에 얼어붙고 말라 물이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시에서 “새해 첫날”을 음력 1월 1일인 설날로 보는 이유는 다음 행의 “함빡 물오르는 소리”에서 구체화 된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나무에 물이 “함빡” 오를 수 있는 것은 추위가 어느 정도 풀린 입춘이 지난 시기라야 한다. 양력 1월 1일은 이상기온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여기서 이 “함빡”이란 말은 여러 면에서 의미를 강조시킨다. 

 

그 “함빡”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땀에 “함빡” 젖었다는 것은 몸에 땀이 흘러내릴 만큼 젖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비에 “함빡” 젖었다는 것은 비를 맞아 온몸과 옷이 젖어 물이 줄줄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에서 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함빡” 들을 수 있음은 물이 흥건하게 오르고 있으니 적어도 입춘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그 “함빡”은 다음 행인 “처녀가 이미 소녀가 아니듯”에서도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시에서는 ‘소녀’와 ‘처녀’를 구분한다. 소녀는 아직 성적 발달이 미숙한 어린 여아로 인식되지만 ‘처녀’는 성적으로 분화와 발달을 이룬 결혼 안 한(이제 결혼할 준비가 된) 여성으로 인식된다. 소녀가 처녀가 되려면 단순한 몸의 성장만이 아니라 여성성이 성숙 되어야 한다. 성적인 발달과 함께 몸이 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여성호르몬이 나무에 물오르듯 함빡 올라야 한다. 그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바로 변화와 성숙을 향한 도전이다. 

 

그렇듯 물이 “함빡” 오른 “오늘의 나무는 이미 어제의 나무가/아니다” 그것은 마치 소녀가 처녀로 변신한 것과 같다. 대단한 성숙이며 자기 도약이다. 이제 나무는 얼어붙고 메말라 있는 힘든 시기의 허물을 벗고 힘찬 희망과 성숙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처녀가 되어 시집을 가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생명을 잉태할 준비가 되어 있듯이 나무도 물이 “함빡” 올라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성장과 생명을 잉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새해 첫날’은 나무에게나 처녀에게나 모든 생명체에게 “새날이다.” 그 새날은 물리적으로 다가온 새날이 아니다. 달력으로 보여주는 새날이 아니다. 어제의 껍질을 벗고 새로 맞이하는 날이다. 구태를 버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날이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작심의 날이기도 하다.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하는 날이다. 우린 그것을 알고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거울 앞에서/자신을 바라보아라”라고 말한다. 새날을 맞이한 자신을 객관화하여 응시해보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대상화해 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누구든 자기 눈으로 자신을 직접 알 수 없고 바라볼 수도 없다. 자신을 보려면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 그 객관화를 위한 방법으로 거울을 동원하였다. 

 

여기서 ‘거울’은 실제의 거울일 수도 있고 마음속의 거울일 수도 있다, 어쨌든 거울은 자신을 비추며 확인하고 성찰하며 다짐을 하고 가꾸게 하는 도구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어제의 나무가 오늘의 나무가 아니듯/너를 바라보는 또 다른/너”가 있다. “너를 바라보는 또 다른 너”는 어제의 ‘너’가 아니고 새로운 ‘너’이다. 여기서 앞의 ‘너’와 뒤의 ‘너’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앞의 ‘너’는 어제의 ‘너’이며 뒤의 ‘너’는 물이 함빡 오른 새날을 맞이한 ‘너’이다. 

 

그러면 어제의 ‘너’는 어떤 ‘너’이며 새날의 ‘너’는 어떤 ‘너’일까? 어제의 ‘너’는 고난과 고독 실의에 찬 ‘너’일 수도 있고, 실패와 우울증에 빠진 ‘너’일 수도 있다. 또 분노와 증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너’일 수 있고, 구태에 빠져 있는 ‘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너’인 새날의 ‘너’는 온갖 고독과 고난과 실의와 우울과 분노와 증오를 벗어던진 희망을 가득 가진 ‘너’이며 새로운 성장의 에너지로 충만한 ‘너’이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 대단히 이성적인 성찰의 메시지이다. 바로 거울을 통한 변화된 자아의 발견이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대상화하여 타자를 보듯 하면, 분명 거기엔 새로운 자아의 모습이 있을 것이며, 또 새로운 자아의 모습을 발견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성찰과 다짐을 통한 자기 발견의 주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에서 ‘함빡 물오르는 소리’는 희망의 소리이며 성장 에너지로 충만한 소리이다. 그것을 듣고 확인하고 다짐한 새날을 맞이했으니 우리 모두 희망을 노래하고 꿈을 설계하며 물오르듯 충전되는 에너지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한편으로 여기서 나무는 ‘또 다른 너’이기도 하다. 

 

지금 우린 매우 힘든 시기의 터널 안에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자영업자들이 서민 경제를 지탱하는 보루였다. 코로나 19로 계속된 영업금지에 생존까지 위태로워지자 자영업자들이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와 불복종 시위를 벌이고 있다. 문을 닫는 자영업자가 줄을 잇는다. 그들이 폐업하면 대출금을 갚으라는 은행의 강요도 잇따른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0.50%에 불과하여 노후는 더욱 불안하다. 거기다가 자영업자의 빚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 자영업자의 빚은 2015년 422조 5,000억 원이었던 것이 2016년에 480조 2,000억 원, 2017년에 549조 2,000억 원, 2018년 624조 3,000억 원, 2019년 684조 9,000억 원, 2020년 6월 755조 1,000억 원으로 매년 가파르게 증가했다. 그만큼 자영업자들이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며 우리 경제가 어두운 터널에 서 있음을 말해 준다. 거기다가 실업자들이 늘고 기업의 고용 확대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청년들이 갈 곳이 더 없어져 우울하게 한다. 빨리 그 터널을 빠져나와야 한다. 그것은 정부를 포함한 사회의 총체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개인 각자의 사고의 전환과 노력도 중요하다.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 백신 접종 소식도 들린다. 모든 국민이 코로나 백신을 맞고 집단 면역이 발생하면 자유롭지 않을까?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을까? 설날을 맞이하면서 옛날에 새해를 다짐했듯이 새로운 ‘나’를 찾고 내일을 다짐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나무에 ‘함빡 물오르는 소리’처럼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의 소리, 성취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새로운 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로 구태를 버리고 새롭게 나아가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다. 시에서 ‘거울을 보아라’는 것처럼 매일 거울을 보면서 변화되는 자신을 확인하고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중국 고대의 하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상나라를 개국한 성군이었던 탕왕(湯王)이 세숫대야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고 매일 아침 세수할 때, 성찰하며 구태를 버리고 자신을 새롭게 발전시켜 갔듯이(湯之盤銘에 曰 苟日新이어든 日日新하고 又日新이라: 진실로 예전의 습관을 버리고 나를 새롭게 변화시킴이 있으면, 나날이 새롭게 나아가게 되니, 또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켜라 대학 전 2장), 날마다 성찰하며 자신을 가꾸는 일은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는 성찰과 다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울을 보며 나를 발견하는 시간은 곧 성찰과 다짐의 시간이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린 아직 늦지 않았고 이제 새날(새봄)이 오고 있다. 김난도가 『아프니까 청춘이다』(쌤 앤 파커스, 2010)에서 청년들에게 우리의 인생 시계는 고작 아침 7시 12분 즉 집을 막 나서려는 순간이라 했듯이 젊은이들은 이제 막 깨어나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있다. 그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다. 나이가 든 어른들도 수명이 길어진 지금은 하루 24시간의 고비가 지나면 새날이 오듯이 삶의 고비가 지나면 다시 아침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련은 나의 힘”이며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는 김난도의 말처럼 결코 절망에 빠지거나 포기하지는 말자. “아프니까 청춘”이듯이 아프니까 인생이다. 그 아픈 청춘(인생)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 있다. 김난도는 말했다. “의미 없는 습관으로 굳어진 취미를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란 식의 변명으로 감싸지는 말라.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성장하는 즐거움이다”(김난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쌤 앤 파커스, 2010, 205쪽) 

 

희망을 잃지 말자. 희망은 강한 용기이며 새로운 의지이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희망이 끊어지면 마음이 병들고 소망이 이루어지면 생기가 솟는다(잠언 13장 12절). 봄철은 희망의 계절이며 삶의 에너지가 샘솟는 계절이다. 시인 월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봄철의 숲속에서 솟아나는 힘은 인간에게 도덕상의 악과 선에 대하여 어떠한 현자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희망과 성장 에너지를 충전하자. 봄이 오는 길목인 설날을 앞두고 나는 오세영의 시를 읽으며 나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희망의 봄이 오고 있어요. 힘들어도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고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해요. 나무에 함빡 물오르는 소리를 들어봐요. 지금 성장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해요”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