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공동대표]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후에 후세들이 가슴 깊이 새기며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훗날의 환난을 대비하라는 의미에서 쓴 『징비록』(이재호 옮김, 역사의 아침, 2007)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은데 만일에 병화(兵禍)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위의 책 31쪽)
우송당 황윤길과 학봉 김성일이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임금에게 그 정세를 보고하였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고 보고하였지만,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것을 듣고 있었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어전 회의가 끝나고 김성일을 불러서 정세를 확인하며 위와 같이 말했다.
김성일은 류성룡의 물음에 “나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동병(動兵)치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겠는가마는,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 중앙과 지방의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이를 해명했을 뿐입니다.(위의 책 31쪽)”라고 답했다.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말에 벌어진 이 사건을 두고 김성일을 죽일 놈으로 황윤길은 정직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황윤길은 조선 시대 문신으로 명종 1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며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서인이었다. 김성일은 선조 때의 학자로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선조 원년(1568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했고 학문이 높아 장령(掌令),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본관은 의성이며 남인이었다. 이 둘은 각기 당시 치열했던 당파의 양 진영에 속해 있었던 문인 학자였으며 내놓으라 하는 지식인이었다.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를 받고 서인과 남인이 갑론을박했지만, 그들이 가져온 왜국의 국서에는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조짐이 확실했다. 그 국서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가겠으니 길을 비켜달라”는 것이었다. 양 당파의 논박을 떠나 일본의 국서만 보아도 상황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지만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싸움질만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가 김성일의 정세보고가 성실하지 못한 죄를 물어 국문(鞫問)하려 했으나 좌의정 류성룡이 구해로 석방되었다. 김성일은 경상우도 초유사가 되고 의병 모으기에 진력했다. 그리고 순찰사가 되어 나랏일에 진력하다가 선조 26년(1593년)에 진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우도에서 의병 모으기에 진력한 김성일, 이로(李魯), 조종도(趙宗道) 세 사람을 진주 촉석루 삼장사(矗石樓 三壯士)라고 부른다. 김성일은 왜란 극복에 온몸을 바쳤다. 하여 그는 뒷날 문충(文忠)이란 시호까지 받게 되었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통신사로 다녀와서 왜 서로 엇갈리는 보고를 하였을까? 김성일은 왜 황윤길의 보고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되는 보고를 하였을까? 이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는 당파싸움으로 서인과 남인 등이 무리를 지어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그런 소모적인 논쟁으로 나라는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것은 그 이전에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갔던 귤가광이 조선 조정의 상황을 보고 탄식하며 한 말인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위의 책 23쪽)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정치인들은 당쟁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상대방을 헐뜯으며 반대하기에 몰두했다. 내 편이면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옹호했고 상대편은 이치에 맞더라고 비판하며 배척했다. 나는 당시의 당쟁상황을 읽으면서, 만약에 김성일이 먼저 보고했다면 김성일 역시 일본이 침략해 올 것이라고 하고 황윤길도 김성일처럼 민심 동요를 부채질한다고 김성일을 비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은 정치적 생존 전략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학자이며 지식인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학자적 양심과 정의보다는 당리당략에 빠지게 하였을까? 그것은 치열한 당쟁으로 얼룩진 지식인들의 잘못된 정치참여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반의 정치는 지식인들이 대거 정치에 참여하여 정사를 돌보던 학자 정치(지식인 정치)의 시대였다. 지식인들의 정치참여는 이치나 정의보다는 미약한 정치기반의 확보를 위한 편싸움에 몰입하였고 결국에는 지방과 서원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면서 편을 갈라 싸웠다. 이른바 사색당파였다. 그것은 곧 학자 정치(지식인 정치)의 실패였으며 폐해였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학문과 정치적 기반은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원에 있었다. 거기서 두 가지 큰 병폐가 출현하고 고착화되어갔다. 바로 서원을 중심으로 한 학맥과 인맥, 지역과 연고주의의 폐해였다. 날이 갈수록 지식인들은 지역주의의 인맥과 학맥에 명운을 걸고 싸웠다 그 병폐가 극에 달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지식인들의 잘못된 정치참여는 당시 학문의 산실인 서원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학맥과 지역주의의 병폐는 일제강점기 독립 투쟁 때도 나타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 정치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 와서 그 고질병이 좀 완화하는 듯 아나 지금도 여전하다.
지식인들이 정치참여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지식인들의 정치참여는 하여야 하며 권장할 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철인 정치 역시 지식인 정치였으며 공자나 맹자 등도 지식인 정치 주장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지식인 정치에는 정의와 지적 양심이란 것이 항상 푯대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지식인들이 정의와 지적 양심이란 푯대보다는 정치적 줄서기와 권력의 아류로 전락하면 사이비 학자, 사이비 지식인이 된다. 그래서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지식인들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들이 권력의 편에 줄을 서면 사이비 지식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 일련의 말들은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지적 양심과 정의에 기반할 때에만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지식인은 권력의 아류, 권력의 줄서기, 권력의 정당화론 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학자들의 정치참여는 신중하여야 하며 그들의 정치적 발언은 4. 19 혁명 때 ‘교수와 지식인들의 시국 선언’처럼 사회적 파장이 크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교수와 지식인들에게서 그런 지적 양심과 정치적 균형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깝다.
2021년 5월 3일 충남소재 대학교수 100인이 독립기념관에서 양승조 충남도지사의 대권 도전 촉구선언을 했다. 그들의 말대로 양지사가 그동안 보여준 탁월한 정책 발굴과 실행력, 인격 등을 모두 인정하고 싶다. 하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아무리 좋은 것도 시기와 정도에 맞아야 성과를 볼 수 있다. 그것이 양지사 본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참여한 일부 교수들이 권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석연찮은 해명도 씁쓸하다.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며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것은 구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시도마다 지역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역 출신 대권 도전자를 지지하고 촉구한다면, 지금도 편 가르기와 내 편이면 사생결단을 내면서 옹호하고 상대편이면 사생결단을 내면서 내치는 정치 구도 속에서 이 나라에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왜곡된 정치참여의 산실이었던 서원의 병폐 같은 병폐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지금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과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왜곡된 정치참여가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작권자 ⓒ 뉴스파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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