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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성북동 비둘기》 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상호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 입력 : 2021/08/30 [14:34]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 경실련 대표] 손녀가 유독 고양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고양이든 강아지든 밖에서 키우는 것은 몰라도 집안에서 키우는 것은 딱 질색이다. 딸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친구가 강아지를 준다고 집에서 키우면 어떻겠냐고 물을 때도 반대했다. 이유는 방안 가득 날리는 강아지 털, 강아지 냄새, 매일 치워야 하는 강아지 똥 등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며, 특히 호흡기에 좋지 않다는 순전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강아지든 고양이든 원래 야생은 자연 속에서 마음대로 뛰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 몫 했다. 집안에서 키우면 종일 좁고 텅빈 아파트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겪을 그 고독도 어쩌면 동물 사랑이 아니라 동물 학대라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딸은 나의 의견에 동의했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후에는 나와 같은 논리로 제 딸을 설득한다. 

 

내가 애완동물을 함부로 키우지 못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이 들면서 장만한 작은 농장은 대로변에 붙어 있는데 몇 년 전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대로변에서 농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풀숲에 작은 박스가 하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 논에 농약을 치기 위해 농수로의 물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간 농약 박스(가끔 그런 일이 있었다) 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나고 수상하여 박스를 들추어 보니 작은 강아지 사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아연질색했다. 숨을 고르고 난 후 가까운 언덕 풀숲에 묻어주었다. 그 사건이 있고 2년 정도 지난 후에는 고양이의 사체 또 그렇게 버려져 있었다. 나는 홀로 분개했다. 강아지든 고양이든 키울 때는 예쁘다고 뽀뽀를 하고 안고 다니면서 싫어지면 버리고, 특히 죽은 후에 묻어줄 수 있는 마음조차 없는 사람들이 무슨 동물을 키우느냐고 허공을 대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그때 내가 쓰던 신문에 칼럼으로 썼다. ‘사랑이란 그 주검까지도 사랑하고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강아지든, 고양이든 키울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금 넘쳐나는 유기견과 유기묘들이 그런 사람들 때문 아닌가? 무자격자들의 이기적인 애완동물 사랑, 사랑할 때는 함께 죽을 것처럼 하다가 싫어지고 부담스러워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무책임함,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과 소유욕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손녀가 고양이를 좋아하니 키워봐야 할 것 같아서, 집이 아니라 농장에서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시골 사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길고양이라도 좋으니 한 마리 구해 달라고 했다. (그 친구도 길고양이를 붙잡아 집에서 키우고 있었다) 친구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길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 놓았다고 연락을 해 왔다. 고양이는 예뻤다. 그런데 적어도 두 달은 묶어두면서 밥을 주고 사랑해줘야 한다고 했다. 두 달 정도 묶어 두는 것이 마음에 무척 걸렸으나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사실 2년 전에도 길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묶어 두었다가 그 족쇄의 고통이 눈에 아른거려 한밤중에 가서 풀어주었던 적이 있었다. 아내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다. 나는 고양이 집도 정성껏 지어주고 아내와 매일 가서 살펴주었다. 고양이는 매우 일찍 우리에게 적응을 했다. 한달 정도 지났을 때 풀어주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집을 나가지 않고 아내와 농장에 가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다리 속으로 파고들며 일을 할 때는 눈밭의 강아지처럼 온 밭을 뛰어다닌다. 

 

아차 이야기가 빗나갔다. 초등 일학년 손녀가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고양이 보러 농장에 오는데 가끔은 제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 손녀가 제 친구에게 말했다. “00야 내가 우리 고양이 한 번만 만지게 해 줄께” 손녀는 제 친구들을 농장에 데리고 오면 완전히 주인 노릇을 한다. 그때 손녀는 갑이 되어 있고 친구들은 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딸에 의하면 그런 일은 손녀가 친구들 집에 가면 친구가 갑이 되고 손녀가 을이 된다고 했다. 이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였다.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들에게도 이미 소유의 차이가 권세의 차이, 자존감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주인과 세입자의 차이가 그토록 나타나는데 어른은 어떨까? 서울에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는데 집 있는 자와 집 없는 자의 자존감의 차이는 또 어떨까? 특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한순간 가슴이 먹먹해 왔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시가 있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였다.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1905〜1977)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종로서적, 1980)-

 

이시는 김광섭의 네 번째 시집 『성북동 비둘기』(1969)에 실린 대표 시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많이 읽히던 시다. 이 시는 국내에서 발간된 여러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처럼 유명하다. 김광섭이 이 시를 쓸 때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모더니즘 시인으로서의 성숙미를 강하게 풍기던 때였다. 이 시는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비둘기를 통해 문명화와 개발 등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과 둥지를 빼앗기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이 시점에 집 없는 사람들, 전세난, 월세난에 쫓겨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도 통한다. 

 

총 3연 24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당시의 시치고는 비교적 길다. 1연은 산업화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과 삶의 터전을 잃은 비둘기의 당혹한 처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연은 본래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갈 곳이 없어 떠돌다가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비둘기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3연은 자기가 마음대로 날던 자연도 잃고 교감을 나누던 사람도 잃고 자기의 상징이었던 사랑과 평화까지 낳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된 비둘기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문명은 인간에게 수많은 편리와 혜택을 주지만 한편으론 삶의 파괴와 소외도 동반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시는 매우 구체적이다. 제1연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그 구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산이나 들, 등 땅에 번지를 매긴다는 것은 지극히 인위적인 것의 상징이다. 인간은 자연인 땅을 관리하고 소유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번지를 부여한다. 특히 문명의 이름으로 개발행위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인간에게는 번지를 부여하는 일이 문명화를 이루는 길이지만, 비둘기에게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이다. 땅을 소유한 자에게 번지를 부여하는 일은 개발과 자본화의 길이지만, 그 땅을 의지하고 살던 사람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는 일이다. 시에서 앞의 번지와 뒤의 번지는 의미가 다르다. 앞의 번지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문명의 번지이지만, 뒤의 번지는 비둘기에게 주어졌던 비둘기가 잃어버린 삶의 터전인 자연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인간이 번지를 부여함으로 비둘기는 삶의 보금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한 개발행위는 비둘기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는 것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개발을 위해선 산을 파고 돌을 깨기 위하여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다. 그 굉음에 산이 울리고 부서지며 돌이 깨어진다. 그처럼 비둘기의 가슴도 깨어진다. 비둘기의 아픔을 매우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비둘기는 원망보다는 자연적이고 순수한 그 본연의 삶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정이 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래서 “성북동 비둘기는/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은 비둘기가 늘 날고 놀며 인간과 어울리던 삶의 터전이며 비둘기의 자유공간이다. 비둘기는 그 자유공간에서 예전처럼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인간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다.

 

개발로 인해 아픔을 겪는 것은 비둘기만이 아니다. 집 없고 땅 없는 사람들에게 개발은 오히려 그나마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헐값에 집과 땅을 강제수용 당하는 사람들에게, 남의 땅 혹은 국유림 산자락에 움막이라도 짓고 살던 옛날 판잣촌 사람들에게 산을 깨는 굉음은 가슴을 깨는 소리가 된다. 

 

제2연은 파괴되어 가는 삶의 보금자리에 그래도 향수를 느끼면서 온몸을 다해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더하는 비둘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 성북동 골짜기는 그 옛날 나무와 숲이 우거진 풍성한 골짜기가 아니라 “메마른 골짜기”가 되어 버렸다. 개발로 인해 베어지고 파헤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마음대로 먹이를 먹던 “널찍한 마당”은 간데없고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만 메아리친다. 그러니 갈 곳 없는 비둘기는 그래도 남아 있는 지붕에 피난하듯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낀다. 그러나 거기도 온전치 못하다. 불안하다. 그래서 비둘기는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파괴되어 가는 보금자리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래도 옛 삶터를 잊지 못하고 방황하는 비둘기의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메마른 골짜기”는 파괴되어 가는 비둘기의 삶의 터전이며 문명화란 이름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지칭한다. “채석장 포성”은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 같은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피난하듯 올라앉은 지붕”은 몇 년 전 수해로 인해 모두가 떠내려갈 때 지붕 위에 올라가 생명을 건진 소들처럼 삶터를 잃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비둘기, 무허가 판잣집에 살다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나 거리에 나 앉은 가난한 사람이 갈 곳 없어 아무곳에나 몸을 의탁하는 처지를 연상하게 한다.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는” 것은 살던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물끄러미 그 파괴되어 가는 현장을 바라보는 허망하고 쓰린 심정을 보는 것 같다. 그래도 안타깝고 그립다.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는 데서는 쫓겨나 갈 곳 없어 가다가도 다시 돌아보고 그래도 오랫동안 삶의 보금자리였던 그곳에 대한 연민 때문에, 혹시나 해서 발길을 돌려 살던 자리에 가서 우두커니 서 있을 어느 쫓겨난 판잣집의 가난한 가족을 연상하게 한다.

 

이렇게 쫓겨난 비둘기나 사람들은 사랑과 평화는커녕, 자기 삶조차 가누기 어려운 유랑의 신세가 된다. 제3연은 그 유랑의 신세가 된 비둘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리고 미래를 연상하게 한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사람 가까이/사람과 같이 사랑하고/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사랑과 평화의 비둘기는” 굳이 비둘기의 모습만이 아닐 것이다. 한창 개발되기 전 가난했던 우리는 서울에서도 판잣집이 넘쳐났다. 그래도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즐길 줄 알았고, 그 삶의 터전을 허용하고 눈감아 주었던 땅 주인을 성자처럼 받들며 고마워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하지만 순박하고 이웃의 아픔까지 어루만질 줄 알았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그들은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잃게 되었다. 산을 잃었음은 삶의 터전을 잃은 것이요. 사람을 잃은 것은 어우렁더우렁 지내던 이웃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누리던 사랑과 평화의 이야기와 삶의 행적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비둘기는 그들에게 붙여진 고유의 가치와 상징인 “사랑과 평화의 사상”도 낳지 못하는 하염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비둘기의 본연은 사랑과 평화를 낳는 것이다. 그것을 낳지 못하면 불구가 된다. 그런데 그 불구를 누가 만들었나? 무자비한 개발을 자행한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들에게 연민도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에겐 모두 사랑과 평화의 본심이 있다. 그러나 쫓겨난 판잣집 사람들에게서 이웃과 평화를 나누며 아픔을 어루만지던 그 옛날의 순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비둘기처럼 사랑과 평화를 낳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누가 그들에게서 순박한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앗아 갔나? 이제 그들에게는 어떻게 이 냉혹한 세상을 헤쳐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만 남았다. 그런데도 가진 사람들은 개발로 이익만을 극대화하려 한다. 개발은 비둘기에게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순수한 사랑과 평화를 빼앗고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본주의적인 이기심만 키워가고 있다. 그래서 문명화될수록 사람들은 자본과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왔다. 

 

시는 감각적인 표현을 다양화하고 있다. 그 흐름은 시각-청각-후각-촉각으로 이어진다. 시각적 표현은 “가슴에 금이 갔다.”와 “새파란 아침 하늘”이 대비된다. 새파란 아침 하늘은 싱그럽고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가슴에 금이 간 것은 공포에 떠는 처참한 모습이다. 청각적 표현으로서 “돌 깨는 산울림” “채석장 포성” “메아리쳐서”는 문명화로 가는 길목의 적나라함과 평화를 깨뜨리는 소리이다. 후각적 표현으로서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는 상실의 아픔에 대한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구공탄 연기는 맡으면 질식한다. 비록 질식할 수 있지만 정든 보금자리를 잊을 수 없는 쫓겨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촉각적 표현으로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는 것은 그래도 떠날 수 없는 향수와 옛날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비둘기의 행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시를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 오는 옛날이야기들이 떠 오른다. 문명화를 위해 개발을 하여야 하지만, 그 개발이 과연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 의 문제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업화의 길로 접어들던 1970년대 후반 갯마을이 고향인 한 선배는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배의 집은 자기 땅이 아닌 갯마을에서 집을 짓고 논 서마지기 정도의 농사를 지어 그나마 양식은 할 수 있었다. 그 아버지는 머슴살이와 품팔이를 하여 아들의 학비에 보태고 어머니는 갯가에서 일을 하여 살림에 보탰다.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 대학까지 들어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학비도 보탤 수 있었다. 그런데 갯마을이 개발되면서 살던 집이 헐리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보상이라고는 몇 푼 안 되는 집값과 땅값, 그리고 3년 치 농사에 해당하는 것뿐이었다. 다섯 식구는 무엇인가 해 보고자 서울에 갔다. 누나와 여동생도 돈벌이에 나섰다. 그러나 갯마을에서 농사와 노동만 해 오던 아버지, 어머니가 할 일은 없었다. 월세를 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서울역 지게꾼이 되었다. 그 아들은 아르바이트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며 대학 생활을 겨우 마쳤다. 아들이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했을 때, 아버지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일을 거의 못하게 되었다. 지게꾼 생활이 몸을 완전히 망치게 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개발로 둥지 내몰림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선배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눈물이 맺힌다. 

 

개발과 개혁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에게 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개발로 인해 수용할 때는 삶을 유지하고 이어갈 만큼의 국가 보상과 보살핌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 못하다. 문명화될수록 개혁은 필요하다. 하지만 개혁을 할 때 피해자가 없어야 한다. 개혁이 가난한 사람들, 특히 하층민들에게 족쇄가 되거나 삶의 터전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최근 몇 년간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많은 사람이 성북동 비둘기처럼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서울에서 50% 정도는 집없는 세입자들인데 그들의 삶은 점점 척박해진다. 거기다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여당이 강행 처리한 ‘부동산 3법’은 오히려 전세난과 월세난을 가중시켰다. 전세난과 월세난이 가중되면 힘들어지는 사람은 집없는 가난한 서민들이다.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집값이 치솟으며 영혼까지 끌어왔다는 ‘영끌’이란 말이 생겨났다. ‘영끌’하여 집을 장만한 사람들은 젊은이들만 아니다. 가족을 이룬 나이 든 사람들도 이 대열에 상당수가 동참했다. 그런데 돈이 너무 많이 풀렸고 늘어나는 가계 빚에 대한 비상 신호가 들어왔다. 정부에서는 금리를 인상하고 시중 은행을 통해 대출 옥죄기에 나섰다. 그래서 영끌한 사람들은 높아지는 이자로 인해 생존 위협까지 강하게 받는다. 그나마 대출로 집 한 채 장만해보려 하는 사람들은 꿈을 접을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주인들은 전세금을 올리고 월세로 전환하여 수익을 올리기 위해 세입자들을 내보내려 한다. 그래서 세입자와 주인 간의 분쟁은 갈수록 급증한다. 

 

코로나 19로 인해 경제가 요동을 치고, 도산하는 자영업자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빈부의 격차, 계층 간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2021년 2분기(4월〜6월) 가계소득이 4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상위 20%의 소득만 유일하게 늘었고, 나머지 계층의 소득은 모두 줄었다. 통계청이 2021년 8월 19일 발표한 가계 동향 자료에 의하면, 올해 2분기 전국 1인 이상 가구(농림어민 포함)의 월평균 소득은 428만7,000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0.7% 줄었다. 감소폭도 2016년 4분기(-0.9) 이후 가장 컸다. 그리고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 격차를 보여 주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올 2분기 5.59배로 지난해 동기 5.03배보다 높아졌다. 돈 없는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직장이 변변치 못하거나 직장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몇 푼의 재난 지원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라도 성북동 비둘기의 신세가 될 공산이 점점 커 가고 있다. 쫓겨나는 성북동 비둘기가 많은 나라는 아무리 국가가 부자여도, 아무리 복지를 부르짖어도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세상, 수많은 성북동 비둘기들(수많은 집 없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문명화의 길에 개발은 불가피하다. 비록 개발되더라도 성북동 비둘기들에게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보전해 줄 수 있는 정치적, 정책적 아량을 기대하는 것은 꿈일까? 인간의 얼굴을 한 개발,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와 정책,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꿈꾸어 보는 것은 유토피아적인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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