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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국화 옆에서》 역경을 이겨낸 원숙한 삶의 아름다움

이상호 | 입력 : 2021/11/22 [11:47]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동해 해파랑길 종주를 시작한 지 한참 되었다. 갈 때마다 설레고 긴장된다. 지난 10월 31일은 27코스, 죽변항에서 부구 삼거리를 지나 28코스를 약 6km를 더 걸어 강원샘물까지 울진 앞바다는 전에 없이 호수처럼 잔잔했다. 죽변항 등대와 드라마 [폭풍 속으로] 촬영지의 언덕 바람도 ‘폭풍 속으로’라는 언어를 잊은 듯 조용했다. 인근의 대숲의 사각거림도 은은했다. 사색이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왔다. 

 

집에서 나올 때는 제법 쌀쌀했는데 걷는 길은 따뜻했다. 걸으면서 두 번이나 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걷는 길은 해변 길만은 아니었다. 아스팔트 위를 걷기도 하고 시골길 작은 냇가 둑을 따라 걷기도 했다. 머리에 내려앉는 가을 햇살을 따라 날아오는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강둑, 주변의 산기슭 곳곳에서 피어나 눈앞까지 달려오는 꽃들의 향연에 빠지고 있었다. 그들 이름의 차별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 노오란 꽃들이 잔잔한 바람에 날리는 모습과 풍겨내는 향기에 몰입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어느 국화 전시회에서도 맡아보지 못한 진한 향기였다. 

 

산과 들에 핀 국화의 향기는 인공으로 재배하여 피워낸 국화의 향기보다 몇 배는 강하고 멀리 날아간다.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 보기엔 사람이 매일 가꾸고 다듬어 놓은 국화는 꽃이 탐스럽고 모양도 다양하며 우아하다. 그러나 산과 들에 피어나 오직 바람과 햇살과 하늘이 내려주는 물만을 마시며 자라난 국화는 탐스럽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태어나 화장 한번 못하고 오직 베옷만을 입고 투박하게 일하던 그 옛날의 산골 소녀같이 수수하고 수줍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풍기는 향기는 매일 사람 손을 통해 영양을 얻고 다듬어진 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단순하고 강하다. 순수함이 화려함을 이기는 순간이다. 자연스러움이 인위적인 것을 넘는 순간이다. 나는 순박하지만 강한 들국화를 바라보고 그 향기를 맡으며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읊었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1915 ~ 2000)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 종로서적, 1980-

 

상당히 유명한 시이면서도 슬픈 시이다. 유명한 시라는 것은 이 시가 과거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시험의 단골손님으로 필수적으로 외워야 할 만큼 서정성을 간직한 서정주의 대표 시였기 때문이다. 슬픈 시라는 것은 1990년대부터 서정주가 친일 문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시의 서정적 아름다움은 퇴색되었고, 교과서에서도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서정적 아름다움과 시대적 슬픔을 동시에 간직한 시라고 말한다. 

 

이 시는 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유명해져 서정주의 대표 시가 되었다. 시는 1956년에 발간된 『서정주 시선』에 수록되면서 더욱 많이 읽히게 되었다. 시가 발표되었던 해방 직후 사회상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 혼란 속에서 서정적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도 어쩌면 이상하다. 봄, 여름, 가을을 잇는 시간 동안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원숙한 아름다움으로 피어난 국화를 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혼란한 세상을 딛고 새롭게 성취하는 세상, 승화의 삶을 향한 꿈을 꾸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역경을 딛고 국화처럼 피어나기를 바랐을까? 어쩌면 고난을 이겨내고 피어난 국화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한때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에 협력했던 시인의 아픔에 대한 자기 은폐나 자기성찰의 서정은 아닐까? 

 

시는 총 4연 13행의 자유시이다. 그동안 논자(論者)들은 국화를 모든 괴로움과 역경, 혼돈의 시간을 극복하고 원숙한 삶을 성취하는 평화와 화해의 꽃이라고 하였다. 동양적 전통에 의하면, 지조의 상징으로 선비의 절친이었다. 찬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 모든 풀이 시들고 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한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향기롭고 탐스럽게 피어난다. 선비들은 그 고고한 품격에 찬사를 보내며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삼았다. 그리고 수많은 시인에 의해 읊어졌고, 묵객들에 의해 화선지를 채웠다. 지금은 그 풍속이 사라졌지만, 중양절(음력 9월 9일)이 되면 계절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 차례를 지내기도 했는데, 그때 국화전을 부쳐 먹기도 했다. 그리고 꽃을 따서 술을 담가 1년 후에 절제하여 마시면 불로장생한다는 속설도 있었다. 지금도 국화차의 은은한 향기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어쨌든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고 자기완성을 이루는 고고한 자태와 자기만의 향기를 풍겨내는 열정과 지조를 지키는 생명력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사람들은 국화를 사랑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서릿발 찬 계절이 오면,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는 국화 전시회를 찾는다.

  

이 시는 생명의 시이다. 제1연은 소리로부터 출발하는 생명 탄생을 예고한다. 제2연은 색채와 소리의 융합을 통해 생명 탄생에 이르는 시련을 노래한다. 제3연은 지난 삶을 돌아보며 삶의 매무새를 다듬는 내적 성찰을 노래하며 제4연은 수많은 인연의 융합을 통해 삶을 승화하며 회자정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인 사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제1연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에서 국화꽃은 한 개체로서의 국화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그저 태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 모체(母體)의 희생뿐만 아니라 온갖 시련을 겪으며 스스로 영양을 섭취하고 깨어나는 ‘자기 트임’도 겪어야 한다. “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에서 ‘봄부터’는 생명 잉태의 시간이다. 모든 생명은 봄에 탄생을 준비한다. 농부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이런 모든 행위는 생명 탄생을 위한 준비다. 그 과정에는 노동과 고뇌가 수반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소쩍새”이다. 왜 하필 소쩍새일까? 어쩌면 소쩍새는 국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봄에 피는 진달래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그런데 소쩍새가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소쩍새는 한의 이미지다. 한의 이미지이기에 붉은 진달래꽃과 어울린다. 국화꽃은 아직 피지도 않았기 때문에 좀 어색하다. 그런데 소쩍새를 등장시킨 것은 마지막에 등장한 “누님”의 모습 때문일 것 같다. 뒤에 가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거울 앞에 선 누님의 모습은 한(기다림과 온갖 시련)을 겪어낸 모습이다.

  

또 주목할 것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이다. “그렇게”는 매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소쩍새는 봄 밤에 한 두 번 운 게 아니다. 봄의 시작부터 봄의 끝까지 밤마다 운 것이 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쉼 없는 갈구와 고뇌와 노고를 의미한다. 한 송이 국화꽃은 그렇게 쉼 없는 밤을 갈구하며 고뇌를 이겨낼 때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송이 국화꽃은 완숙에 이른 아름다운 성취의 모습이다. 그것을 굳이 국화꽃에 한정하면 이 시는 죽는다. 따라서 여기서 피어난 한 송이 국화꽃은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성취하고 완숙에 이른 모습, 온갖 오욕을 이겨내고 자기완성을 이룬 삶의 모습과 견주어 볼 수 있다. 

 

이런 이미지는 제2연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는 제1연과 같은 의미다. 그러나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의미한다. 소쩍새는 봄이 가면 떠나간다. 한이 소멸하는가 했더니 또 겪어야 하는 고난과 고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름에 다가온 고난과 고뇌의 상징인 천둥이다. 여기서 천둥은 비바람 몰아칠 때만 내리는 천둥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여름이란 계절에 겪는 온갖 고난을 총칭한다. 그 고난과 고뇌는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서 보듯이 연속되는 고난이며 고뇌이다. 여기서 “또”라는 말은 고난과 고뇌의 연속성을 의미한다.

 

이제 시는 시간적 전환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간다. 그 세계는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의 세계다. 제3연에서 그렇게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을 겪으며 피워 낸 국화꽃의 모습에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하고 경탄한다. 그 모습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다.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시절이다. 젊음의 뒤안길이 “머언 머언”이라 했으니 오랜 시간이 흘렀음이다. 추억에 대한 아득한 회상이다. 

 

“젊음의 뒤안길”은 어떤 길이며 거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에서 “젊음의 뒤안길”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길이다. ‘그리운 길’은 기다림의 길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누구일까?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일까? ‘누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김소월의 ‘님’일까? 만해 한용운이 그리는 ‘님’일까? 아니면 꿈과 희망의 상징일까? 어쨌든 ‘님’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님이다. 오지 않는 님이다. 그러기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에 주어진 공간이 “젊음의 뒤안길”이다. 그 길에는 젊은 날의 꿈과 낭만과 사랑, 그것이 좌절되는 수많은 절망과 방황, 그리고 고뇌와 도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젊음의 길’이 아니라 ‘젊음의 뒤안길’이 된다. 뒤안길은 화려하지 않은 어두운 길이며 더듬어야 하는 고뇌의 길이기 때문이다.

 

시는 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에서 절정을 이른다. “인제는”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시간이다. “돌아와”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제자리로 온 것을 의미한다. 돌아왔으니 회귀이다. 누님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돌아온 누님이 다른 곳이 아닌 거울 앞에 섰다. 왜 거울일까? 거울은 나를 비추며 성찰하게 한다. 거울 앞에 선 누님은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다듬고 삶을 돌아보며 성찰한다. 그러기에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은 생의 성숙을 의미한다. 그 성숙은 도덕적인 성숙이 아니라 미적 성숙이며 삶의 성숙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달관이랄까? 

 

이 시에서 압권은 바로 “누님같이 생긴 꽃”이다. 꽃은 대체로 여성성을 상징하지만, 전통적으로 선비들이 좋아한 국화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강한 남성성을 지닌다. 그런데 시인은 그 국화꽃에 여성성을 부여했다. 이제 국화꽃은 전통적인 선비의 상징으로서의 ‘군자’가 아니라 성숙한 미의 상징인 ‘누님’이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더욱 친근하게 되었다. ‘누님’은 군자보다 더 가까이 있고, 더 다정하고, 더 아름다운 이미지를 준다. 군자는 동경과 수양 지향적인 남성의 상징이지만, ‘누님’은 포근하고 아름다운 성숙한 여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화꽃은 고결함의 상징에서 친근함의 상징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렇게 국화꽃은 서정주에 의해 전통적인 군자의 이미지를 떠나 원숙한 여성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그 여성도 특히 우리와 가장 친근한 거리에 있는 ‘누님’이다. 여기서 시인은 왜 ‘누님’보다 친근한 ‘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누이’는 ‘오누이’ 등과 같은 말처럼 친밀성은 강하지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성숙미가 덜한 이미지다. 그러나 ‘누님’은 나이 차이가 나는 존경과 사랑이 담긴 애정의 안식처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 ‘누님’은 젊음의 뒤안길에서 온갖 한과 시련을 이겨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누님’이다. 그래서 ‘누님’은 젊음이 다 지난 여성, 즉 한참 나이가 든 매우 성숙한 중년 이상의 여성이다. 이 ‘누님’은 세상의 모든 여성성을 포괄하는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이다. ‘누님’은 구도적인 절제보다는 심미적인 사랑의 샘터를 지닌 애착 관계의 원형을 형성한다. 그래서 이 ‘누님’은 모든 한을 이겨내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감싸줄 수 있는 포근한 애정의 ‘누님’이 된다. 

 

제4연에서 화자의 인식은 자기에게로 향한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에서 화자는 생명이 탄생하여 누님같이 원숙한 길로 접어들기 위해서 겪는 한과 시련을 비로소 깨닫는다.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까지는 앞에서 나온 소쩍새의 울음, 먹구름 속에서 우는 천둥과 같은 객관적 인식의 맥락이지만,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는 내적 인식의 맥락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고뇌와 자기성찰로 연결된다. 온갖 시련을 겪어내고 원숙하게 피어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을 보며 ‘간밤에 잠이 들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어쩌면 시인으로서 완숙한 삶과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수많은 밤을 고뇌하고 갈등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누님같이 생긴 꽃’과 ‘노오란 네 꽃잎’은 시련을 극복하고 문인으로 성장한 자기 자신 혹은 그렇게 탄생한 ‘한 편의 시’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죽음(무서리)을 딛고 서는 처절한 울부짖음(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이 깃들여 있다. ‘서리’는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와 같다. 그런데 국화꽃은 그 서리를 맞으며 피어났다. 그러기에 서리를 맞으며 피어난 국화는 역경을 딛고 선 원숙한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국화는 내면에 한계를 극복하는 초월의 힘을 간직한 것으로 인식된다. 

 

시가 지닌 또 다른 특징은 청각적(소리) 이미지와 시각적(색채) 이미지로 융합이다. 소리의 이미지는 소쩍새의 울음에서 시작하여 천둥의 울음을 거쳐 무서리로 이어진다. 시각적 이미지는 거울 앞에선 누님, 노오란 꽃잎 등이다. 이것은 봄-여름-가을이란 시간적 흐름과 다시 융합된다. 봄(소쩍새-울음-한풀이)에서 시작하여 여름(천둥-먹구름 속 울음- 시련)을 거쳐 가을(무서리-죽음-불면의 밤)을 거치는 과정에서 온갖 것들이 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그것을 견뎌내야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꽃(노오란 네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 여기서 계절적 이미지를 우리의 삶과 대비해 보면 봄은 탄생과 유년기의 꿈과 사랑, 여름은 성장과 청장년기의 고통과 시련, 가을은 중년 이후의 시련과 성숙한 삶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소리로 시작하는 추측의 청각적 이미지는 ‘거울 앞에선 누님’ ‘노오란 꽃잎’의 구체적 현상의 시각적 이미지로 완성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원숙한 삶(원숙한 시)일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끝맺음의 단어인 “보다”가 더 주목된다. 시는 “보다”라는 추측으로 시작하여 ‘보다’라는 추측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한 추측은 단정보다 더 강한 상상의 여지를 준다. 그리고 이 추측의 “보다”가 시를 살려낸다. 만약에 “보다”를 사용하지 않고 “울었다”로 해 버렸다면 시는 부드러움과 운율을 잃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이런 추측성의 언어가 지닌 힘을 새삼 깨닫는다. 

 

생명은 수많은 고난과 고통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축복한다. 만약 생명 탄생에 아무런 고통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축복의 여지도 사라질 것이다. 육신으로서의 생명 탄생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성취 또한 고난과 고통의 산물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삶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위대한 성취, 위대한 삶은 고통을 극복하고 이겨낸 후에 이룬 것들인지 모른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란 제목은 국화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으며 그 국화가 피어나기 위해 겪는 삶의 고통 또한 우리와 아주 가까이 혹은 우리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노오란 네 꽃잎”의 “네”라는 말에도 그 꽃(성취)이 내 바로 앞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삶의 고통과 한은 모두 나와 가장 가까운 곳 즉 내 앞에 있는 것들이기에 우리가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 그럴 때 삶은 아름다운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며 그 성취 또한 진정으로 내 앞에 있는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뜬금없이 몇 년 전에 읽었던 리즈 머리(Liz Murray 1980〜 )의 자서전 『길 위에서 하버드까지』(정혜영 역, 다산책방, 2016)가 떠 오른다. 그녀는 1980년 뉴욕의 빈민가에서 마약쟁이 아버지와 매춘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나마 아빠와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었지만 15세 되던 해 아버지는 마약이 심해, 엄마는 에이즈에 걸려 보호소에 끌려가고 홀로 거리의 소녀가 된다. 거리에서 최악의 삶을 살던 그녀가 어느 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로 하고 대안학교에 들어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 등에서 잠을 자며 공부하여 2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뉴욕 타임즈] 장학금을 받고 당당히 하버드 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2009년 졸업한다. 현재 뉴욕에 ‘매니페스트리빙’이란 회사를 창시하고 세계를 돌며 강연과 자선사업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한순간에 인생이 최악으로 변할 수 있다면 최선으로도 변할 수 있다.” “삶은 본인이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삶은 최악에서 최선으로 피어났다. 그녀의 삶과 성취의 과정은 소쩍새의 울음, 먹구름 속의 천둥소리, 간밤의 무서리보다 더 혹독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 ‘노오란 꽃잎’ ‘거울 앞에 선 누이 같은 꽃’이 되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삶의 강한 의지를 심어 준 것은 삶의 고통이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코로나 19가 우리를 지배하고 무한경쟁의 질서 속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허덕인다. 많은 청년이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서성거리고 하루살이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한다. 수많은 자영업자가 삶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들에게 아직 소쩍새가 울고 천둥도 먹구름 속에서 운다. 간밤에 무서리도 내린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시련의 날이 지나면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 ‘노오란 꽃잎’ 같은 아름다운 성취의 날이 올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도 《국화 옆에서》는 국화 향만큼이나 우리의 삶에 향기를 더해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인의 친일 행적은 씻을 수 없는 삶의 오점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들을 읽으며 한 문인의 삶의 애환을 느낀다.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지조와 주체성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함께 깨닫는다. 만약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수많은 공적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국화 옆에서》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픈 시이다. 어쨌든 이 가을에 사람들이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국화꽃 같은 원숙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피어나길 기도한다. 우리 집 베란다 앞에 심어 놓은 국화도 ‘노오란 꽃잎’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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