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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깃발》, 비록 몽상일지라도 높은 이상을 갖자

이상호 | 입력 : 2022/01/19 [13:47]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위드 코로나(With Corona)로 새해 해맞이를 하는가 했더니, 많은 사람이 새해 해맞이를 포기했다. 거리두기 강화로 봉쇄된 것이기도 했다. IMF가 이 나라를 덮친 때가 기억이 난다. 1999년, 새해 아침, 사람들은 앞다투어 해맞이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그때 중학교 2학년 딸이 정동진으로 새해맞이를 가자고 졸랐다. 내가 보령교육청에 근무할 때였다. 1998년 마지막 날 일을 마치고 천안으로 올 때, 동해로 50만 명이 몰릴 거라는 뉴스를 5만 명으로 잘못 들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12월 31일, 새벽 2시, 우리 가족은 온갖 준비를 하여 집을 떠났다. 영동고속도로를 들어서자마자 차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고이려니 했지만 정체였다. 조금씩 밀려서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낮 12시, 인산인해였다. 차를 댈 곳이 없어 아내와 번갈아 운전하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강릉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정동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8시 30분이었다. 어디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장만해 간 음식도 바닥이 났다.

 

아이들이 회를 먹고 싶다고 했다. 동해가 좀 한가할 것 같아서 동해로 갔다.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불 꺼진 항구엔 금강산을 오가던 [금강호]만 찬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횟집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1월 2일) 출근하려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도저히 아침이 되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선으로 향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을 무렵에 도착한 정선은 어두웠다. 간신히 만두집 하나를 찾았다. 문을 닫는다고 하여 만두와 어묵 국물을 사서 차 안에서 먹었다. 그리고 어둠을 뚫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길을 따라(그때는 네비게이션도 없었다) 방향과 간혹 나타나는 도로 표지판만 보고 운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3시였다. 꼬박 25시간을 운전만 한 셈이었다. 나는 두 시간가량 자고 차를 몰고 보령교육청으로 출근을 했다. 그후 아이들은 해돋이 구경얘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그때는 사람들이 IMF라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새해 해맞이를 떠났다는 점이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는 해맞이까지 코로나 19에 봉쇄당했다. 그런 새해는 시작부터 우울이다. 미세먼지까지 덮치고 대선을 앞둔 세상도 혼탁하다. 방역 패스로 곳곳이 ‘아우성’이다. 이 우울과 아우성을 어찌하랴. 힘들어도 희망만은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유치환의 시 《깃발》을 읽는다.

 

깃발

 - 유치환(1908〜1967)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한 사람이 바닷가에 서서 높이 매달려 바람에 사정없이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외치고 있다. 역동적인 절규다. 이상세계를 꿈꾸는 자의 동경과 좌절을 느낀다. 희망을 향한 끈을 놓지 못하는 자의 방황도 읽는다. 이 시는 <조선 문단>(1936)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과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단골 메뉴로 실렸었다. 학생들의 마음에 높은 이상을 새기기를 바라는 계몽적인 의도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즈음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유치환이 친일문학인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때는 유치환의 시를 즐겨 읽었다. 그의 시 《바위》 《행복》 《그리움》 등은 상당한 에너지와 서정성을 깨운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각 때문에 한동안 읽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친일 문인의 글도 읽기로 했다. 그들의 삶에 스민 애환과 지조를 지키지 못한 삶의 오욕도 함께 느껴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쓸 때만 해도 유치환은 친일 문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치환은 1942년 2월 6일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대동아전(大東亞戰-태평양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찬양하고 황국신민으로서 모든 예술가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만선일보(滿鮮日報)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 지방에서 발행된 한국어 신문이다. 안타깝게도 유치환은 형 유치진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9행으로 된 한 묶음의 시이다. 1행〜3행은 이상세계를 향한 동경을, 4행 〜6행은 이상세계를 향한 몸부림과 좌절, 그럼에도 이상향을 향한 강렬한 동경을, 7행〜9행은 영탄적 질문을 통해 이상적 세계를 향한 좌절의 아픔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꿈을 놓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자는 바닷가에 서서 높이 단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외친다. “이것은”은 한 사물로서의 ‘깃발’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그 ‘깃발’의 펄럭임을 심리적으로 은유, 형상화 한 것이다. ‘아우성’은 소리치며 몸부림치는 것인데 ‘소리가 없는 아우성’이니 모순이다. 침묵한 가운데 몸부림만 강하게 남았다. 왜 소리치지 못하고 몸부림만 강하게 남았는가? 아우성의 역설이다. 욕망의 간절함이다. 일제 강점기에 마음대로 이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의 역설적 표현인가? 그래서 아우성은 소망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또는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 때, 언어조차 잃어버린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외침이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희망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화자는 그 아우성을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했다. 어쩌면 절망적인 아우성에 비해 너무나 온정적이며 감상적이다. 이것 역시 모순이다. 아우성은 계속 격렬한 몸짓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저 푸른 해원’은 어디인가? ‘해원’은 ‘바다의 근원 즉 드넓은 바다의 저 끝’이다. 국어사전에는 ‘지구상에서 육지를 제외한 부분으로 아래로 움푹 꺼진 땅에 짠물이 차서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넓고 큰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곳에 가지 못하고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들 뿐이다. “노스텔지어(nostalgia)”는 원래는 ‘지나간 시절 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그곳에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절절하게 사무친다. “영원한”은 그런 노스탤지어가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곳임을 강조한다. 그러면 화자는 애초에 어디서 왔는가? 그것을 화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고향이자 이상향이다. 꿈과 낭만과 자유와 평화가 깃든 낙원과 같은 곳일 것이다. “손수건”은 아우성치는 《깃발》의 다른 표현이다.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면, 이별할 때 손수건을 흔들고, 자기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손수건을 흔든다. 그러니 갈 수 없는 그곳에 ‘나 여기 있음’과 ‘나의 간절한 욕망’을 손수건을 흔들어 댐으로 알리려는 소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나는 동경하는 이상세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여기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장소는 육지이다. 화자가 서 있는 현실 세계 즉 실존 세계다. 그곳은 이상과 꿈이 좌절되고 있는 아우성의 장소이다. 꿈을 잃어버린 혹독한 현실이다. 반면에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저 푸른 해원’은 동경하는 가상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낭만적이며 꿈과 자유와 사랑이 꽃피는 곳일 것이다. 그래서 ‘깃발’이 서 있는 곳과 ‘저 푸른 해원’은 현실 세계와 이상세계, 좌절된 현실과 동경하는 가상 세계, 실존과 비 실존의 세계로 대비된다. 화자는 좌절된 실존 세계에서 영원한 이상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이상세계를 향한 동경은 좌절과 방황에 빠져든다. 그래서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낄” 수밖에 없다. “순정”은 꿈 많은 소년 시절 품었던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일 것이다. 비록 시련에 흔들리지만, 내면 깊이 간직한 순수한 소망일 것이다. 그 “순정”이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만 있으니 좌절의 연속이다. 《깃발》의 나부낌은 꿈과 좌절과 방황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애수”에 젖는다. “애수”는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과 슬픔을 강조한다.

 

그 “애수” 즉 좌절과 슬픔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달려 있다. 거기에 매달려 “백로처럼 날개를 펼” 뿐이다. 여기서 “이념의 푯대”란 비록 이상향에 갈 수 없어 좌절되었지만, 그 이상향을 향한 마음과 의지만은 굳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이념과 의지는 “맑고 곧은” 것이니 비록 현실의 삶이 좌절과 치욕 속에 있을지언정, 마음만은 순수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화자의 내면에서 이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백로’는 흰빛이다. 흰빛은 순수함이다. 때가 묻지 않음이다.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펼” 뿐이니 구속된 현존재의 한계 상황에 대한 순수하고 곧은 마음을 지키려는 거부의 몸부림(아우성)이다.

 

7행~9행의 “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은 영탄법과 도치법을 혼용했다. 화자는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본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그 좌절을 세상에 “애수”로 드러내고 단지 이념과 의지만 외치는 자(그)가 누구인가? 돌아보니 자기만 아니라 ‘동경과 좌절’ 속에 고뇌하는 사람들 모두이다. 그것은 큰 깨달음이다. 그래서 “아아, 누구던가?” 하고 감탄사를 토한다. 여기서 도치법과 영탄법은 그것을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애수” 즉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하는 비애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강조한다. 어쩌면 이상세계에 가지 못하는 구속된 현실에 처한 비극적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자. 절규인지 모른다.

 

이 시는 상당 부분을 비유로 의미를 살려냈다. 특히 여기서 표현되지 않았지만, ‘하늘’의 이미지가 숨어 있다. 저 푸른 해원은 바다 깊은 곳일까? 드넓고 푸른 하늘일까? 멀리 바라보는 해원은 망망한 바다 위의 하늘뿐이니, 아마 꿈꾸는 하늘일 것이다. 《깃발》이 흔들리는 곳도, 손수건을 흔드는 곳도 하늘이다. 하늘은 높은 곳이며 꿈과 동경의 세계이다. 그런데 하늘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리고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만 흔들어 대니 절망이다. 그래서 바다와 ‘하늘’은 ‘도저히 갈 수 없지만 그래도 동경하는 세계’, ‘깃발’과 ‘손수건’은 ‘절망과 소망이 뒤범벅된’ 것으로 비유된다.

 

여기서 ‘바람’의 이미지는 매우 의미가 있다. 깃발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깃발을 마구 흔들러 대니 깃발은 ‘아우성’을 친다. 그 ‘아우성’은 두 가지의 이미지를 가진다. 하나는 저푸른 해원 즉 이상세계를 향한 ‘아우성’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향한 ‘아우성(손수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소리 없는’ 것이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유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순정’을 흔들어 댄다. 바람에 흔들리는 ‘순정’은 안착할 곳이 없다. 그래서‘ 애수’가 된다. 그리고 그 ‘애수’는 ‘이념의 푯대 끝에’서(강한 마음과 의지로) 순수한(백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날개를 펴다). 그러한 바람은 시련의 상징이다.

 

그 바람의 이미지를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자. 당시는 일제 말기의 잔혹했던 시기이다. 그래서 바람은 일제의 극한적인 압제 상황에서 자행되는 온갖 협박과 회유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깃발》은 압제에 시달리는 문인들일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아우성은 그들의 곤혹스러운 마음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 압제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꿈과 자유와 평화가 있는 이상세계를 동경하지만, 도저히 갈 수 없는(실현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좌절을 경험하면서 자학하고 있는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의 마음과 의지만은 가지고 있음을 위안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삶은 그렇지 못함을 은유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내 비록 현실적으로 좌절과 절망 속에 서 있지만, ‘마음만은 결코 그렇지 않고 순수하다’는 자기 위안이요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순정과 애수로 나타낸다. 이렇게 보면 시는 다소 비열해진다. 비약일까?

 

그러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직 시인은 비열한 대열에 끼지 않았다. 고뇌에 빠져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그 좌절에 대한 슬픔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이념의 푯대 끝’에서 순수함을 지키고 싶어 한다. 변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시 절망한다. 꿈은 좌절되고 좌절 속에서도 또 꿈을 꾸며 애수에 젖는다. 꿈의 동경과 좌절의 연속을 겪는다. 그래서 외친다.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아는 그는” 누구냐고. 그래서 《깃발》은 높고 큰 꿈을 향한 안타까운 좌절과 그 높은 이상에 대한 동경 즉 몽상일 수 있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부끼며,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깃발》처럼, 모든 꿈에는 좌절과 몽상이 깃들여 있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척박하며 그 척박한 현실이 그 이상의 세계로 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몽상일지라도 높은 이상이 있기에 우린 위안하며 버텨내고 내일을 꿈꿀 수 있다. 따라서 우린 좌절과 몽상 속에서도 꿈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꿈을 꾸고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를 세우고 찾아야 한다. 비록 그 위에 ‘애수’의 날개를 펼지라도 말이다. 실패와 좌절이 연속되더라도 ‘갈매기 조나단’(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류시화 옮김, 현문미디어, 2008)처럼 다시 날개를 펴야 한다. 그래야 코로나 19로 힘들고 혼란한 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비록 몽상일지라도 꿈까지 잃으면 우린 살길이 더욱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몽상일지라도 높은 이상을 가지자.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라도 날개를 펴보자.

 

유치환의 시《깃발》을 읽으며 갈매기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 보자.

 

“조금 전에 했던 맹세는 잊혀졌다. 그것은 세찬 바람결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스스로 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한 약속은 오직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는 갈매기들을 위한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에겐 그런 약속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23쪽>

 

“그의 유일한 슬픔은 고독이 아니었다. 다른 갈매기들이 자신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눈부신 비상의 기쁨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그들은 눈을 열고 보기를 거부했다.”<43쪽>

 

“그렇다. 조나단,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은 하나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도 아니지. 천국은 완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대가 완전한 속도에 이르는 순간 그대는 천국에 가닿기 시작할 것이다. 조나단, 그리고 완전한 속도란 시속 천 킬로미터 또는 시속 백만 킬로미터로 나는 것도 아니고, 빛의 속도로 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숫자든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완전함이란 한계가 없는 것이지. 아들아, 완전한 속도란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에 가 있는 것이다.”<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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