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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칼럼]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 누가 말을 죽였는가?

이상호 | 입력 : 2022/02/04 [11:1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대표] 빵을 배급하는 자는 권력도 배급한다<<J. 해링턴)

 

최근 인기 드라마로 방영되던 KBS <태종 이방원>에서 말을 죽였다는 논란이 커져 방송 중지까지 요구하는 청원이 빗발쳤다. 문제의 발단은 이 드라마에서 이성계가 말을 타고 가다 낙마하는 장면을 찍는 중이었다. 말의 다리에 와이어를 묶어 달리던 말이 강제로 넘어지게 한 일이 있었다. 이때 말은 앞으로 넘어지면서 고개가 땅에 박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배우도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말은 1주일 이상 치료를 하였으나 목뼈가 부러져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동물자유연대에서는 ‘명백한 동물학대’라고 비난하고 많은 네티즌의 항의도 빗발쳤다. 심지어 드라마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KBS는 사과문까지 발표했으나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동물 학대를 넘어선다. 왜 말이 실제로 넘어지게 하여 촬영했을까? 그것은 그 장면을 현실감 있게 함으로써 드라마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한 욕심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말과 배우의 안전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였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시청자들의 리얼(real)한 감상 욕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제작진의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엔 말과 배우의 안전 문제를 넘어선 인간 욕망의 문제까지 내재되어 있다. 인간은 현실감 있는 체험과 극한적인 유희를 위해 때로는 다른 모든 것들을 그 도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의 생동감을 유발하고자 하는 욕심을 위해 말과 배우는 한갓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 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인간은 유희를 위해 어디까지 사람을 도구로 삼을까?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얼마나 파괴될까? 호레이스 멕코이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horse"』(호레이스 맥코이 지음, 송예슬 옮김, 레인보우퍼블릭북스, 2020) 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성의 극적인 파멸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삶이 처참해지는 것은 역사적 진리이다. 1930년대 미국은 세계 대공황에 빠져들었다. 빈부의 격차는 극심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한 끼의 밥을 구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때 할리우드 스타를 꿈꾸는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난다. 그들은 글로리아와 로버트였다. 

 

글로리아는 이혼과 근친, 성폭력 등 비참한 삶을 경험하며 살아오다가 집을 나온 거리의 처녀였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버스를 놓치게 되었다. “저 망할 버스” 그녀의 짜증스러운 말을 듣던 로버트는 그녀와 극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리고 둘의 운명적인 삶이 시작된다. 

 

그들 역시 대공황 시절이라 한 끼의 밥조차 해결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들이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거나, 단조로운 삶에서 오는 무료함과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곳곳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아니면 찾아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그래서 죽음이 아니라면 그 어떤 극한의 일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댄스 마라톤 대회’라는 이상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둘이 한 파트너가 되어 수개월 동안 마지막 커플이 남을 때까지 원형 경기장을 끝없이 돌면서 춤을 추어야 했다. 이 대회에 참가하면 숙식도 제공된다. 글로리아는 숙식이 제공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버트에게 한 팀이 되어 출전할 것을 제안한다. 글로리아의 제안으로 로버트는 그녀와 함께 댄스 마라톤대회에 커플로 참가하게 된다. 그들은 순전히 상금보다는 탈락 전까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이유만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다.

 

대회엔 남녀가 한 조가 되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누구와도 짝이 되어 춤만 출 수 있다면 계속 참가할 수 있다. 절대 쉬지 말고 춤만 추면 된다. 대회 중간중간에 마라톤 경주도 한다. 참가한 남녀 한 커플은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춰야 한다. 1시간 50분 동안 춤을 추고 10분 동안 휴식할 수 있다. 먹을거리와 쪽잠이 10분 동안 주어진다. 따라서 그 10분의 휴식 시간에 세면과 식사, 수면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여기엔 범죄자들도 끼어들기도 한다. 마약과 다른 게임 플레이어들도 등장한다. 이들 바닥 인생들은 이 한탕에 목숨을 걸어 미친 듯이 광기 어린 춤 행진을 이어 간다.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지배자인 기업과 이들을 취재하는 언론인들은 대회를 열기를 돋우기 위해 열정을 발휘한다. 여기에 할리우드 작가들과 영화인들까지 가세한다. 그 중간중간에 눈에 띄는 커플들은 광고 대행사들의 가벼운 표적이 되기도 한다. 간혹 사회자의 유창한 언변으로 이벤트성 결혼식도 진행된다. 그것은 좀 더 자극적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대중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은 흥행을 위해 매년 이 자극적인 대회를 개최한다. 

 

대회가 시작되고 참가자들은 계속 광란의 춤을 춘다. 일확천금을 노린 참가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삶의 목적이나 꿈도 상실한 채 오직 최소한의 숙식만을 해결하기 위해 참가한 사람들이다. 흥행업자들은 그들을 이용하여 온갖 쇼와 볼거리를 제공하며 돈을 번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있는 비참한 동물이 되어 주어진 연기인 춤추고 마라톤 하는 일에만 매진하는 이미 동물이 된 그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관람료를 내고 입장한다. 그들은 그들의 광란의 춤을 보며 즐긴다. 잔인한 동물 쇼를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 마치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 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로마 귀족들과 같다. 끝날 무렵에 우승자가 발표된다. 마지막까지 그 광란의 춤을 견뎌낸 단 한 커플만이 우승자가 되어 상금 10,000달러를 받는다. 그 이후, 그들은 광고를 찍어 돈을 벌기도 하고, 재능을 보이면 헐리우드 주변에서 조연으로 출연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회가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은 극도의 피로감에 꿈과 현실의 경계 혼란에 빠진다. 점차 심신이 피폐해지고 영혼마저 상실한 무표정한 얼굴로 변해간다. 추악한 인간의 욕망이 치부를 드러내며 처절하게 이어지던 대회는 몇 발의 총성으로 또다시 시작되고 광란의 현실은 계속된다. 하지만, 이 대회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허탈하고 비참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젊은이들은 더욱 허탈함과 비참함에 빠져든다. 그래도 한탕과 고달픈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젊은이들은 이 대회에 참가하고 또 허탈에 빠져들기를 반복한다. 그들에게 최종 우승자가 되는 길은 허상이나 다름없다. 누적 시간 879시간 남은 커플 20, 이때 빗나간 총알이 두 사람의 든든한 후원자인 레이든 부인의 이마에 박힌다. 레이든 부인은 죽게 되고 그 죽음으로 대회는 우승자를 가리지 못하고 끝이 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늘 목말라 하던 주인공 글로리아는 그 광란의 대회에서 삶의 허탈함을 느끼고 한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대회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글로리아는 끝없는 우울의 늪을 헤맨다. 그런 그녀를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로버트도 함께 절망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고 긴 암울한 터널 안에 그들은 갇혀 있다. 그들의 작고 소박했던 지난날의 꿈조차 점점 한 조각의 허망한 망상으로 변질해 버린다. 

 

글로리아는 더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로버트에게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파트너인 로버트에게 총을 건네며 말한다. “제발 쏴줘요.. 고통을 끝낼 방법은 이것 뿐이에요” 자기를 고통 없이 보내 달라는 글로리아의 간곡한 부탁에 로버트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가 유년 시절에 다리가 부러진 암말을 할아버지가 장총으로 고통 없이 쏘아 죽이던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쩌면 말의 고통을 줄여 주는 것도 선한 행위의 한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로버트는 방아쇠를 당긴다. 총알이 글로리아의 머리를 관통했다. 권총의 섬광이 그녀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 그녀의 눈과 입은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글로리아는 죽음으로 실존을 회복했는지 모른다.

 

로버트는 살인죄로 법정에 선다. 판사와 법정의 모습이 전개되고 중간중간에 경찰관의 취조가 이어진다. 로버트는 지난 긴 시간 동안 해변에서 마라톤 댄스에 몰두하였던 자신을 회상한다. 그리고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피의자 신분이 되어서 내몰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로버트는 말한다. “글로리아와의 인연은 조금 우습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때 그녀도 나처럼 어떻게든 영화판에 들어가려 애쓰는 신세였다. …그 만남이 아니었다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그녀를 보러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댄스 마라톤 대회’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삶의 아비규환과 같다.

  

이 ‘댄스 마라톤 대회’는 1920년대에서 3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대회라고 한다. 작가 호레이스 맥코이는 한 때 범죄 취재기자로 일했으나 가산을 거의 탕진하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다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마라톤 댄스 대회의 경비원으로 일하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상당 부분 현실을 반영한다. 

 

이 세상이 바로 그러한 춤과 광기의 현장인지 모른다. 욕망의 끝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을 끝없이 적나라한 춤과 광기의 현장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더 많은 유희의 자극을 위해 자본을 투자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 동물 등이 그 유희의 도구로 전락한다. 또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 자본을 축적한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은 더 강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온갖 거짓과 모함과 모순을 만들어내며 대중을 현혹한다. 많은 사람이 그 광란의 춤에 관객으로 등장하여 즐기듯이 그 권력 지향자들의 편에 서서 열광한다. 이 소설에서 나는 최근에 히트 친 〚오징어 게임〛의 전신을 본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일까? 가진 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고 못 가진 자들 역시 생존을 위한 사투 또한 끝이 없다. 모든 이들은 죽지만 그 죽음은 다르다. 가진 자들은 가졌기에 욕망을 마음껏 충족하다가 욕망의 더미에 묻혀 죽고, 못 가진 자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또 어떤 이는 가진 자들의 욕망 충족의 도구가 되어 신음하다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죽어간다. 

 

이 소설의 모든 과정과 장면은 인간사회의 이러한 총체적인 모순과 비극을 연출하고 결국엔 인간성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 좀 과장되긴 했으나 이 기괴한 ‘댄스 마라톤 대회’는 인생의 무작위와 불합리, 무의미를 완벽히 보여주는 삶의 축소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일부 악덕 업자들은 그것을 악용하여 또 돈을 번다. 그 과정에서 유희 욕구를 위해 인간을 도구로 삼는다. 이런 세상에서 삶의 목줄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작고 평범한 삶마저 파괴된다. 이 소설은 그런 현상이 반복되는 세상에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갈구이며 고발이다. 

 

그런데 이런 잔인한 인간의 욕망은 정치와 경제가 혼란하고 사회적 혼돈이 닥칠 때 더욱 기승을 부린다. 혼돈의 사회에선 혼돈을 이용하여 돈과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들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인 말초적인 유희와 생존 본능을 악용하여 사람을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희를 즐기는 자들은 더 자극적인 유희를 찾아 나서고 그 대상들은 처참하게 소외되어 간다. 인간 실존은 의미를 상실하고 유희와 소외만 남는다. 권력의 세계도 이와 같다. 많은 대중이 권력 지향자들의 편에 서서 경주하듯이 열광하고 많은 사람이 그런 열광에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허탈해한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horse"』 누가 말을 쏘았는가? ‘그들은 말을 죽였다.’ 누가 말을 죽였는가? 다리가 부러진 암말을 장총으로 쏘아 죽이는 로버트의 할아버지 행위는 정말 말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한 선한 행위일까? 글로리아를 권총으로 쏜 로버트의 행위는 글로리아의 고통을 끝내는 선한 행위일까? 이 시점에 우린 왜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할까? 말을 쏜 사람은 할아버지이지만 그런 인식이 팽배한 당시의 사회의식이었을 것이며, 그런 의식에 동참한 모든 사람이었을 것이다. 댄스 마라톤 대회에서 참가자들은 영혼마저 잃고 죽어가지만, 문제는 그 잔인한 대회를 생각 없이 즐기는 당시의 대중 의식이었을 것이다. 말을 죽인 것은 드라마 제작진이었지만, 우리 사회에 팽배한 보다 극적인 장면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유희 욕망도 함께 했음이다. 그리고 그런 욕망에만 편성한 도덕적 불감증에 빠진 제작진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 지금의 우리 삶과 의식을 돌아본다. 그리고 진정한 존중과 실존을 위해 질문해 본다. 특정의 기사를 쓰기 위해 일부 사람들의 인권은 짓밟혀도 좋은가? 사진작가가 아름다운 꽃(특종)을 찍기 위해 수많은 야생화가 짓밟혀도 좋은가? 인간의 유희를 위해 코끼리들은 그토록 엉덩이를 찔려야 하는가? 인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반려동물은 종일 방안에 홀로 갇혀 외롭게 주인을 기다리도록 해야 하는가? 

 

사회가 혼란할수록 사람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래서 신종 사기도 판을 친다. 여기에 정치인들의 사기성 선동도 한층 진화한다. 독일이 세계 1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혼란이 없었다면 히틀러와 나치는 태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코로나로 혼란한 이때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대중을 선동한다. 대중은 왜 그런 선동에 동참하는가? 글로리아를 쏜 로버트가 할아버지가 말을 고통 없이 죽이기 위해 장총을 쏜 것처럼, 로버트가 그런 생각으로 글로리아를 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린 지금도 무료함을 달래고 유희를 즐기기 위해 타인과 다른 생명체의 존엄을 무시하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살기 위해 인간 유희의 도구로 스스로 전락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 많은 사람이 사람들의 그런 유희적 욕구와 생존 욕구를 악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선행이라는 무감각에 빠진다. 거기에는 정치인과 자본가, 모든 대중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린 지금도 삶의 현장에서 당당하게 말을 쏘고 있는지 모른다. 말을 죽이고 있는지 모른다. 권력과 유희와 생존 욕구의 틈바구니에서 인간 실존과 생명존중의식 그리고 최소한의 도덕률은 무감각의 늪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함께 사는 참살이를 위해 그 무감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인간성의 승리를 이루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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