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대표] 일상을 감사로 보내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쌓일 수 없다. 혹여 쌓였다 하더라도 이내 눈처럼 녹여버린다. 때로는 스트레스도 자기 성찰과 성장을 향한 신호로 받아들이기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늘 행복하며 자기 삶을 위안하며 정진하여 갈 수 있다. 유명한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Oprah Gail Winfrey 1954〜 )는 아주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불우한 시절을 겪었지만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았기에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를 건강하게 시작할 수 있음’을 신에게 감사하며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인간 스트레스 연구에 세계적인 권위자인 한스 셀리 박사(hans seyle, 1907〜1982, 오스트리아 빈 출생, 캐나다의 내분비학자)는 “인간 스트레스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이라고 했다. 그는 저서 『삶의 스트레스 The Stress of life』, 『고민이 없는 스트레스 Stress Without Distress』 등에서 일관되게 ‘모든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사’라고 했다. 즉 인간관계에서 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없다. 혹여 발생해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불만과 불평을 가지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스트레스를 받게 되며 그 스트레스로 타인을 공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감사란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소망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에게 베풀어 준 것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며. 감사의 느낌을 일으킴으로써 다른 사람이 나의 행복에 동참하고 싶도록 만든다. 실제로 나의 실수나 실언도 받아들이고 웃어 주는 사람은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며 어느새 나의 마음도 선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감사는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에게 베푸는 관용과 친절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일이다. 자기를 위한 일로 인해 타인도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감사는 마음에 담아 두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마음에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이나 자기방어적인 마음을 가지면 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은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 분노 등을 비우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자기방어적인 성향을 다스려야 한다. 만약 자기방어적인 성격을 너무 강하게 간직하면 상대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가령 한밤중에 원치 않는 핸드폰 문자가 날아와 잠을 깨웠을 때, 모자라는 잠을 깨웠다는 자기방어적인 성향을 드러내면 그 문자는 고약한 테러가 된다. 하지만 그 문자가 나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 여기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그것도 싫다면 문자가 거슬리지 않게 무음(無音)처리 하거나 꺼 놓는 일도 좋다. 그러한 일 또한 자기 비움의 한 과정일 것이다.
최근 단톡방이 유행한다. 내가 아는 한 정치인이 단톡방을 열어 자기가 아는 지인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물론 그 안에는 특정 대선 후보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나 역시 그리 환영하는 바는 아니지만, 보내는 지인의 성의를 생각해서 묵묵히 지냈다. 그가 내가 아는 사람이고 나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보내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떤 분이 거기에 “이런 것 보내지 말라”는 내용의 독설을 올렸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거기에 나는 이렇게 썼다. “단톡방에 초대되었음은 초대자가 관심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요. 만약 자기의 정치적 의사와 맞지 않으면 나가면 되고, 정치적 의사와 맞지 않아도 무슨 소리 하는지를 알고 싶으면 그냥 있으면 되고, 그렇게 유연하게 지내다 보면... 다만 주의할 것은 누구를 설득하려 하거나, 누구를 비방하거나, 나간 사람을 억지로 초대하지 않는다면.. ” 그후 단톡방엔 독설이 사라졌다. 많은 사람이 나가고 그냥 운영된다. 나는 나의 정치적 의사와 상관없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냥 그 단톡방에 남아 있다.
분노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볼 때, 분노는 반사회적인 분노와 정치 사회적인 분노와는 차이가 있다. 반사회적인 분노는 자기에 대한 불공평이나 부당한 대우 혹은 소외된 감정 등으로 특정의 외부로 향하게 한다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분노이다. 이는 사회적인 범죄로 연결될 수 있다, 위험하다. 그러나 정치 사회적인 분노는 사회를 정화하는 소금과 같은 구실을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민주적인 정치 사회적인 행태나 불공정과 불합리에 시민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부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보편적 가치에 기준을 두지 않고 특정의 정치 세력이나 이념에 근거하는 분노의 표출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반사회적인 분노가 될 수 있다. 오로지 정의와 공정에 의한 분노일 때 가치를 발휘한다. 다만 그 분노의 표출 방법이 문제이다. 분노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표출되어야 가치를 발휘하며 특정 개인이나 집단 집단을 향한 폭력적일 때는 그 가치를 상실한다.
심리학자들은 감사하는 생활을 위한 자기 비움에는 내 안에서 솟아 나는 좋지 못한 기억, 남과 비교하기, 부정적 생각, 감정적인 갈등 등을 지울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그것에 집착함으로써 좋지 못한 기억을 망각하지 못하여 되새기게 되고, 자기를 남과 비교함으로 자기 비하와 분노를 느끼며, 부정적 생각과 감정적 갈등을 비우지 못해 잠 못 이루는 밤을 겪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그런 것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결국엔 그것의 노예가 되어 스트레스는 가중된다는 것이다. 하여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과 나쁜 기억, 남과 비교하기, 감정적인 갈등 등을 비우는 노력은 감사하는 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감사를 통한 자아 내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비우는 노력은 결국 자기 정화를 이루는 길이며, 정화를 통해 자기와 타인에 대한 긍정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렇게 비움을 통한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웃음과 관용과 수용이 깃든다고 했다. 웃음과 관용과 수용이 깃든 삶은 행복한 삶이다. 여기엔 비움을 통한 자기 정화가 필수적이며 감사는 그것을 위한 시작이요 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감사의 최종 귀착지는 자기 위안으로 가는 길이다.
시로 돌아가자. “매사에 감사하니/ 하루가 감사 아닌 날이 없다.” '시'라기보다는 한 줄의 잠언이다. 하이쿠를 연상한다. 하이쿠는 불교에서 선사(禪師)들이 추구한 삶의 방법과 언행, 그리고 글쓰기의 방법이라고 전해진다. 특히 일본에서 발달해 왔다. 장황한 문장을 비우는 과정으로 비우고 비우다 보면 한두 줄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한 하이쿠는 말을 하되, 버리고 줄이다 보면 무언(無言)이 된다. 버리고 버려 결국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공(空)이며 공(空)의 상태는 해탈의 경지가 된다. 그러나 시는 결국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니 하이쿠는 해탈 직전의 가장 정제된 언어가 된다. 가장 정제된 언어로서의 하이쿠는 많은 상상과 메시지를 전한다, 독자는 짧은 언어를 통해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으며 마음껏 그 내면에 숨은 언어를 감상하고 즐긴다.
그런데 우린 일상에서 그 하이쿠와 같은 언어생활이 가능할까? 사람은 설명적 동물이며 설명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따라서 하이쿠와 같은 말(시詩)은 그의 삶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일상의 평범한 외마디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가령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상적 언어이다. 그러나 그런 삶으로 일관했던 소크라테스의 삶이 그 말에 담겨 있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준다. 성철 스님이 입적(해탈)하기 직전에 남겼던 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하이쿠의 시와 언어는 순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 이면에 숨은 것이 너무도 많다. 사람들은 그 이면에 있는 침묵의 언어를 읽고 해석하여야 하는데 일상에서는 자기 멋대로 읽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때로는 선의 언어로, 때로는 악의 언어로, 때로는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읽어 곡해할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하이쿠를 일상의 언어로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짧은 한마디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는 경우가 있기에 유익한 언어 방식이다.
이숙의 시 “매사에 감사하니/ 하루가 감사 아닌 날이 없다.”에서 “매사”는 삶에 주어진 모든 시간과 공간적 상황이다. 그런 모든 상황에서 나타나는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긍정하며 관용과 친절,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가 감사 아닌 날이 없다”는 것은 주어진 모든 날이다. 살아가는 평생을 의미한다. 이 말은 시인 자신이 늘 그렇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이란 현실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매사에 감사하라, 그러면 감사 아닌 날이 없을 것이다.”란 미래형 언어로 대치하여 감사의 생활을 하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생활을 해 가자는 권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임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형의 시제로 쓰였지만, 미래형의 권고 시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모두 매사에 감사하는 생활로 하루하루를 감사 아닌 날이 없도록 만들어 가자. 감사는 자기 위안을 위한 삶의 정화 방식이며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움과 관용의 미덕을 매일 체험하려 노력해 보자. 설날에 일이 많았다고 짜증 낼 일이 아니라 가족들이 모여 정을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 있다면, 설날은 즐거운 날이었으리라. 지인의 문자가 나를 기억하는 관심 표현이라 여긴다면 귀찮은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좋지 못한 기억, 남과 비교하기, 부정적인 생각, 감정적인 갈등 들을 비우고 감사를 채우려는 노력이다. 남은 인생을 감사의 생활화로 나를 정화해 가고 싶다. <저작권자 ⓒ 뉴스파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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