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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사랑에 사는 여인》의 가슴앓이

이상호 | 입력 : 2023/01/28 [18:01]

▲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소소감리더십연구소소장)     ©뉴스파고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소소감리더십연구소소장]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은 누구나 가슴앓이를 경험한다. 한밤중에도 잠이 오지 않고 가슴은 절벽 위의 잔도를 걷는 것처럼 쿵쿵 뛴다. 눈은 말똥말똥하고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딱히 잡히지 않는다. 별들도 잠이 들었는지 적막함만 다가온다. 그저 홀로 고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마음은 계속 그이(?)에게로 진하게 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가온다. 이런 즈음에 릴케의 시 《사랑에 사는 여인》이 진하게 가슴 속으로 다가온다.

 

주의의 것 모두가 아직도 내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마치 수정의 깊이처럼 투명하여

어슴프레하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마음속에 별마저

잡아 둘 것만 같다그토록이나

내 마음은 크게 여겨진다

 

아마도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여

매 손에 붙잡기 시작한 그 사람을

내 마음은 쉽사리 다시 놓아 버렸다

한 번도 씌어진 일이 없는 듯이

낯선 나의 운명이 바라보고 있다

 

불러대면서도

구군가가 그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어떤 다른 사나이 속에

몰락하는 운명을 지고서

 

-릴케 사랑에 사는 여인》 전문-

 

이런 풍경을 상상을 해 본다. 봄이 어슴프레 오고 있다. 뒤쪽 멀리 높이 솟은 산자락 그 꼭대기에는 아직 흰 눈이 남아 있고 뭉게구름이 산허리를 감아 돌고 있다. 그런데 대지는 잠에서 이미 깨어나 초록을 향하여 한참이나 다름박질 쳐 왔다. 그 산자락 아래 넓은 평원 여기저기 외딴집이 있고 평원엔 이미 초록이 완연하다. 아직 어둠이 밀려오지 않은 늦은 오후 해가 지기 직전이다. 사람들도 양들도 모두 집으로 들어갔나 보다. 거기 한 외딴집 창가에 성숙한 한 여인이 두 손으로 턱을 받쳐 고이고 앉아 말없이 수정 같은 눈망울만 말똥거리고 있다.

  

무엇을 바라볼까?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여인은 “주위의 것 모두가 아직도 내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것처럼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다. 고즈넉한 풍경은 여인의 고독한 마음이요 풍경과 하나가 된 여인의 고독한 마음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에 젖고 있다. 여인의 수정 같은 눈망울처럼 “모든 것은 마치 수정의 깊이처럼 투명하여”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잊었는지 모른다. 아니 풍경과 여인의 마음이 말을 삼켜버린 것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에 골똘하게 빠져들어 생각에 사로잡히면 말을 잊는다. 그 무엇인가에 골똘하게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마음의 심연에서 피어오르는 사연이기도 하지만, 그 마음과 하나 되는 풍경의 탓이기도 할 것이다. 마음과 하나 된 풍경은 그 심연의 마음을 수정 깊이처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지만, 그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슴프레하기만 하다. 도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기에 더욱 어슴프레 하다. 여인은 분명 누군가의 고독한 사랑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 

 

왜 고독한 사랑인가? “아마도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여/ 내 손에 붙잡기 시작한 그 사람을/내 마음은 쉽사리 놓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놓아 버린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놓아 버렸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절대로 놓아 버린 것이 아니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만 나는 결코 님을 보내지 않은’것처럼, 님은 나의 깊은 가슴에서 수정처럼 투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한 번도 씌어진 일이 없는 듯이/낯선 나의 운명이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수정같이 순수하고 고독한 사랑에 빠져보지 않았을 때는 자기의 마음속에 그런 고독한 가슴앓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서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그런 가슴앓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는 그것은 자기의 낯선 운명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순수한 사랑에 빠져 고독한 밤을 지낼 때는 그런 자기의 낯선 운명을 맞이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에 빠져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사랑에 관하여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그 사랑을 놓아 버릴 때 분노나 증오나 질투로 변한다면 그 사랑은 이미 순수하거나 고독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를 향한 사랑으로 전락한 천박한 것이 된다. 

 

그러기에 “불러대면서도/누군가가 그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두려워한다” 사랑은 그렇게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다. 또 발설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요란하지도 교만하지도 않다. 다만 고독할 뿐이며 기다릴 뿐이며 용서하고 놓아줄 뿐이다. 여인은 사랑을 놓아주어야 할 운명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 깊이 묻어 두고서 “어떤 다른 사나이 속에 /몰락하는 운명을 지고서” 창가에 고독한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그 사람에게 가지 못하는 여인의 운명은 몰락하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김소월이 시 <진달래꽃>에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고 한 것처럼 여인은 사랑하는 이는 가슴에 묻고 다른 그 어느 사나이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고 있나 보다. 가슴 시리다. 그러기에 고독하다. 그러나 여인은 원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말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불러대면서도/구군가가 그 소리를 듣지나 않을까/두려워”하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어슴프레한 고독과 그리움만 밀려올 뿐이다.

 

그 옛날 트윈 폴리스가 부른 노래 <웨딩케익>이 생각난다.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잠 못 이루고 깨어나서 창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사람은 간 곳이 없고 외로이 남아 있는 웨딩케익/그 누가 두고 갔나 나는 아네 서글픈 나의 사랑이여/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생략>...”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늘 그 사랑을 현실로 이루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과 현실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사랑을 모두 현실화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의미를 모르거나 사랑을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적어도 인류 이래로 이어져 온 사랑에 ‘아름다움’이란 말을 붙이려면 사랑을 소유의 차원을 넘어 아니 그 이전의 선험적인 무상명령처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명화된 지금 문명을 돌아보면 문명은 인간의 소유욕을 증폭시켜 왔다. 그와 함께 사랑도 소유의 세계로 끌어들여 일부는 자본화하였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사랑이 소유의 세계에서 자본화되거나 물화(物化)될 때 거기에는 “놓아줌”이 없는 소유를 향한 다툼과 분노와 질투와 폭력이 발생한다. 그것은 문명의 왜곡된 병적 현상이다. 이런 문명의 병적 현상에 의해 사랑이 물화되고 자본화되어 소유의 세계로 끌어 내려질 때, 소중한 인간의 낭만(浪漫)은 함몰될 수밖에 없다. 낭만이 함몰된 세계의 사랑도 슬플 뿐이다. 오늘날의 사랑이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래서 100년이 훌쩍 지난 릴케의 이 시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낭만적 사랑이 살아 있어야 사랑을 향한 구도적 기도도 함께 살아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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