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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푸른 하늘을》 자유를 향한 고독한 절규

이상호 | 입력 : 2021/04/21 [12:48]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우리가 맞는 하루하루는 모두 의미 있는 날들이며 오늘과 내일을 위해 성찰해야 하는 날들이다. 역사 속의 하루하루는 창조와 성취에 대한 찬양의 날들이기도 하지만, 자유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의 날들이기도 하다. 우린 그런 역사 속의 하루하루에 담긴 의미를 새기고 성찰함으로써 오늘을 더욱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더 풍요롭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내일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 속의 하루하루는 성찰과 다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날들이기도 하다. 

 

군부 쿠데타로 민주주의와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미얀마 사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상황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 우리가 겪은 일을 지금 미얀마 국민이 겪고 있다. 지금 미얀마 군경은 사람 그림자만 봐도 총질을 해대며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진압하는 야만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군경의 만행에 4월 8일 하루에도 82명이 숨졌다. 군경의 이런 만행에 미얀마 국민은 ‘집단학살 같았다.’며 분노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발발 후 4월 8일까지 최소 701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군부는 군인 살해 혐의로 시위대 19명에게 사형선고를 했다.(동아일보 2021.4.8.) 모든 쿠데타 세력이 그렇듯이 시위대에겐 잔인하고 진압 세력에겐 관대하다. 

 

미얀마 사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이다. 민주주의와 정의 수호라는 야만의 탈을 쓰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짓밟고 있는 군부의 만행에 맞선 미얀마 국민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고독한 투쟁 소식에는 피의 냄새가 흥건히 배어있다. 역사상 민주주의와 자유의 쟁취를 위한 모든 투쟁은 고독했으며 피의 냄새가 났듯이 말이다. 미얀마 군부의 만행과 국민의 투쟁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미얀마 국민은 고독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본다. 그 민주와 자유의 쟁취 역사엔 항상 고독한 투쟁과 피의 냄새가 배어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와 자유, 평등과 정의, 풍요와 아름다움도 고독한 피의 냄새 위에 서 있음을 우린 잊고 사는지 모른다. 

 

4월, 그것도 4.19의 새벽엔 3시에 잠이 깨었다. 몸을 깨우고 책꽂이에서 누렇게 빛바랜 시집 한 권을 꺼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였다. 그리고 이틀 동안 자유를 파괴하는 것들에게 분노를 느끼며 투쟁하듯이 자유를 갈망한 시인의 절규를 읽었다. 그의 많은 시 중에서 특히 자유를 향한 고독한 절규를 담은 시 《푸른 하늘을》을 몇 번이고 읽었다. 대학 시절 이 시를 읽었을 때와는 다른 맛이었다. 시는 읽을 때마다 맛을 달리한다. 그것이 시의 위대함이리라 

 

푸른 하늘

김수영(1921~1968)-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시는 자유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과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전국이 4. 19혁명의 물결로 뒤덮었던 1960년 6월 25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4. 19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돌아보아야 한다. 

 

모든 권력의 속성은 오래가면 부패하기 마련이고, 한번 잡으면 놓기 싫어한다. 해방과 함께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1948년 들어선 이승만 정권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했다. 이승만은 그들을 찬양하는 세력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 지고, 마음도 갇혀버렸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바라는 국민은 그들에게 등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는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에 불리했다. 이를 감지한 자유당은 전국적으로 반공개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수 조작 등 온갖 비겁한 수법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른바 ‘3.15 부정선거’였다. 이에 전국의 학생과 국민은 분기했다. 

 

시위의 불길은 마산에서부터 강하게 솟아올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총격과 폭력으로 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고 진압 세력은 무고한 학생과 시민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1차 마산 시위는 3월 15일 있었다. 이때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는 2차 시위로 이어졌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진정한 민주 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 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시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던 학생들이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상당수가 큰 부상을 당했다. 괴청년들은 정권이 동원한 정치 깡패들, 일종의 홍위병들이었다. 

 

학생과 국민은 더욱 분노하였으며 다음 날인 4월 19일 총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경찰의 강제 진압이 어려워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강제 진압에 나섰다.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은 늘어갔다. 하지만 분노한 학생과 국민의 시위는 더 거세져 갔다. 4월 25일 이승만 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 시내 대학 교수단 300여 명이 선언문을 채택하였고 이에 고무된 학생과 시민들은 정권의 무력진압에 굽히지 않고 투쟁의 공도를 높혔다. 이 과정에서 총칼로 진압하던 경찰과 군인의 이탈까지 생기면서 정권의 폭주가 어려워지자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하였고 시위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하기 2일 전에 외무부 장관으로 임면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4. 19혁명에는 피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다. 

 

시(詩)로 돌아가 보자. 시는 총 4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다. 매우 의지적이다. 제1연에서 화자가 말하는 시간적 배경은 봄, 그것도 4월이다. 봄에는 노고지리가 푸른 하늘을 날며 즐겁게 노래한다. 노고지리는 종다리(영어: Eurasian skylark)과에 속하며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에서 볼 수 있는 텃새다. 종달새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시인들은 봄에 노고지리를 소재로 시를 읊어왔다. 노고지리는 겨울 추위로부터의 해방과 희망의 봄을 알리는 새로 규정지어진다. 

 

시인은 제1연에서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출발한다. 봄에 노고지리는 푸른 하늘을 날며 자유롭게 노래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많은 시인과 선비들은 그런 노고지리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며 찬양했다. 시에서 “푸른 하늘”은 노고지리나 인간이 갈망하는 자유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자유공간을 얻고 누리는 과정은 다르다. 

 

위의 구절에서 “제압하는”과 “부러워하던”을 살펴보자. 제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것처럼 마음껏 즐기고 활용한다는 것이다. 타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타자의 개입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노고지리의 자유공간인 푸른 하늘은 노고지리의 전유물로서의 공간이다. 그러니 인간이 볼 때 얼마나 부러운가? 과거의 많은 시인은 그것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시인이 부러워한 것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제압하며 노래해야 하는 자유공간(푸른 하늘)은 고독한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위의 구절에서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은 누구일까? 그는 아마 자유를 노래했던 프랑스의 시인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를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폴 엘뤼아르, 『시의 힘으로 나는 다시 시작한다』 오생근 옮김, 문학판) 엘뤼아르는 그의 시 <자유>에서 그가 얻은 자유를 찬양했다. 그에게 자유 그 자체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어느 시인의 자유를 엘뤼아르의 자유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역사상 수많은 시인과 선비는 노고지리와 같은 자유를 부러워하며 노래했다. 그러나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는 엘뤼아르처럼 자유 그것 자체를 그것 자체로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시적. 정치적 이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분노하고 규탄한다.(김현, 《자유와 꿈, 김수영의 시 세계》,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그런 점에서 김수영이 말하는 자유는 과거 시인들이 말하는 자유처럼 예찬하고 부러워하는 자유가 아니라 쟁취하는 자유, 쟁취해야 하는 자유이다. 

 

제2연에서 시인이 말하는 자유는 더 분명해진다. 노고지리의 자유는 투쟁과 희생을 치르지 않은 봄의 도래와 함께 누리는 피상적이고 낭만성 있는 자유지만,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투쟁과 희생을 통해 쟁취하는 자유이다. 인간에게는 그런 자유만이 진정한 자유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선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이다. ‘자유를 위해 비상하는 일’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여기서 “비상”은 노고지리의 비상이 아니다. 자유라는 목표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의 고독한 비상이다. 그렇기에 그런 비상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실천해 보지 않은 사람, 투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그런 비상을 경험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여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네 가지이다. 여기서 “알지”라고 하는 그 ‘안다’는 것은 그저 단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인식하고 그에 담겨 있는 사연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투쟁하여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자유를 바라보는 시각과 자유란 본질에 대해 아는 것에 차이가 난다.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투쟁하여 본 사람)이 아는 첫 번째는 “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이다. 노고지리가 보고 있는 푸른 하늘은 시인이 보는(보고 싶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고지리가 보는 푸른 하늘(자유공간)은 주어진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누려야 할 푸른 하늘(자유공간)은 투쟁으로 쟁취한 공간이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자유 공간은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피상적 자유공간이다. 인간의 자유공간은 혁명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자유공간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공간이 된다. 시인은 노고지리의 자유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공간을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의미를 새겨보자. 시인에게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바라봄’이나 정서적 감성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통한 본질 인식이며 정의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본다’는 것이며 ‘바로 본다’는 것은 본질의 세계를 본다는 것이다.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투쟁하여 본 사람)이 아는 두 번째는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노고지리가 자유롭게 제압하는 자유공간(푸른 하늘)처럼 우리가 마음껏 제압하는 자유공간을 얻기 위해서는 고독한 투쟁과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권력은 민중의 자유 억압을 통해 영구 집권을 획책하며 그들의 정치․ 사회적 모든 이익을 점유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민중이 갈망하는 자유를 짓밟고 유린한다. 그렇기에 민중은 자유를 얻고 세상을 완전한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 투쟁에는 희생이 따르며 희생이 따르기에 피의 냄새가 난다. 자유의 쟁취는 그 ‘피’의 댓가이다. 투쟁하여 본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다.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 '(투쟁하여 본 사람)이 아는 세 번째는 '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혁명은 자유를 향한 투쟁을 의미한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비록 성공했다 하더라도 금세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혁명은 불안전하다. 그리고 혁명에는 늘 희생이 따르기에 고독하다. 모두가 함께 혁명의 대열에 섰지만, 희생의 길은 외롭다. 비록 그 희생을 추모하고 기리지만 희생자가 가는 길은 외로울 뿐이다. 그렇기에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혁명에는 고독이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마련이다.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투쟁하여 본 사람)이 아는 네 번째는 제4연의 '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아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의 고독성을 반복을 통해 강조한 것이며, 혁명이 지닌 고독성을 당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혁명은 고독한 투쟁이며 피의 냄새가 나는 희생이 따르고 실패할 가능성이 크며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금세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 혁명은 더욱 고독해야 한다. 만약 혁명이 고독성을 가지지 않으면, 그 고독성을 당위로 받아들여 체화하지 않으면 혁명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혁명에 수반되는 고통과 불안, 승리의 기쁨까지 일체의 감정적 동요를 배제하고 혁명의 좌절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가 절대 필요하다. 만약 그것들에 동요되면 혁명은 실패하게 되며 좌절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혁명은 고독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시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의지를 절규하듯 호소한다. 그 투쟁 의지에는 자유를 억압하는 외부 권력과의 투쟁만이 아니라 투쟁에 수반되는 고통과 불안, 실패에 대한 두려움, 승리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적 동요를 고독하게 이겨내야 하는 내면과의 투쟁 의지도 포함된다. 그리고 혁명에 수반되는 피(희생)를 감내하는 용기와 결의가 있어야 한다. 

 

역사상 모든 혁명에는 고독한 피의 냄새가 난다. 혁명에는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의 대립이 존재한다. 특히 혁명 세력이 민중일 때 그 피의 냄새는 더 진하다. 반혁명 세력은 항상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 세력 내부의 갈등과 다툼도 피로 이어질 수 있다.

 

로마공화정을 이룩한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85~B.C42)의 혁명에도 반혁명 세력의 피가 있었다. 브루투스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친아들까지 처형해야 하는 비참함을 겪게 된다. 현대적인 의미의 혁명(revolution)과는 다르지만, 하늘의 뜻(백성의 뜻)에 충실한 덕 있는 사람은 왕위에 오르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왕위를 잃게 된다는 역성혁명에도 피가 수반되었다. 예를 들어 역성혁명을 제창한 맹자(孟子 B.C371년경~B.C289년경)가 인정한 중국 고대의 하(夏)나라 폭군 걸왕(傑王)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은(殷)나라 탕왕(湯王)이나 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폐하고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역성혁명도 피를 흘렸으며 세종이 용비어천가로 칭송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도 피가 낭자했다. 비록 역성혁명이 맹자가 설파한 선양혁명(禪讓革命)이라 해도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4.19를 이어광주 항쟁, 6월항쟁 등 민주주의와 자유의 쟁취 과정도 그랬다. 그래서 혁명에는 항상 피가 수반되며 고독하다. 특히 민중 혁명은 외로운 투쟁의 과정이다,

 

김수영의 시를 읽다 보면 그의 시 정신은 정서나 감정의 언어적 표현을 넘어 세계를 관찰하고 인식하는 하나의 정신 작용으로 작동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는 1960년대의 중요한 문제였던 민주와 자유의 쟁취를 위한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시인이 가진 시 정신의 초점은 감상이나 향수를 넘어 시대의 인식이며 불의에 대한 분노이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에 있는 것 같다. 

 

혁명정신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혁명정신은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사회주의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침전되었을 뿐‘이라 했듯이 수면 아래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권력이 독선과 장기 집권을 자행하며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언제나 수면 위로 올라 분노할 수 있다. 

 

지금 미얀마 국민의 분노도 그런 혁명정신의 발휘라 할 수 있다. 그들의 분노와 고독한 투쟁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위정자들도 민중의 잠재된 혁명정신을 존중하며 겸허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정자와 국민 모두 김수영이 말했듯이 혁명정신은 고독하고 고독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를 바란다. 김수영은 지금도 이 땅의 민중들이 진정한 민주와 자유를 향한 혁명정신으로 깨어 있기를 바란다. 그 ‘깨어 있음’은 반혁명세력에게만 아니라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고독한 투쟁이 필요함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우린 비로소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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