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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뿌리에게》 전하는 모성의 위대함

이상호 | 입력 : 2021/05/07 [09:06]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올해 어린이날 아침엔 봄비가 조용히 내렸다. 5월의 비는 생명의 비이다. 그것도 조용히 내리니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 봄비는 차가운 기운을 잔뜩 머금었다. 애써 심은 농작물들이 냉해를 입을까 두려웠다. 코로나 19로 얼어붙은 세상은 차가운 봄비처럼 어린이날을 차갑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올해 어린이날은 유독 차가운 슬픔이 서린다. 

 

어린이날의 의미와 풍습도 많이 달라졌다. 아이들에게 어린이날은 선물받는 날이다. 그러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부모들은 고민이 많다. 어떤 할아버지는 어린이날 손자 손녀들 선물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다. 한번은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장난감 가게에 갔다가 아이가 고가의 장난감을 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당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린이날의 숭고한 의미가 자본주의의 물결에 허우적거린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정인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동학대로 인해 16개월 된 입양아가 사망하여 그 엄마(33)가 구속․수감 되었다. 숨진 아이는 확인되지 않은 어떤 물체가 등 쪽을 강하게 내리쳐 장이 파열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고 했다. 아이가 입양된 뒤 16차례나 지하주차장 등에 방임된 정황과 아이가 심각하게 왜소하고 멍든 흔적이 보였다는 어린이집과 병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입양한 엄마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며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근 마켓에서 이불에 싸인 아기 사진 두 장과 ‘아이 입양합니다. 36주 되었어요’라는 글이 올라왔는데 더 충격적인 것은 아이 판매금액이 20만 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비보가 날아왔다. 인천에서 8살 된 어린 딸을 학대하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엄마는 계부가 딸을 학대 폭행하여 사망하게 하는데도 방치했으며 폭행사망 사실은폐에도 동조했다. 숨진 아이는 사망 당시 영양결핍이 의심될 정도로 야윈 상태였으며 몸무게는 또래보다 10㎏가량 적은 15㎏ 안팎으로 추정됐고 기저귀를 사용한 정황도 발견됐다고 한다. 심지어 친모는 딸이 사망하기 이틀 전부터 밥과 물을 전혀 주지 않았고 옷을 입은 채 거실에서 소변을 보자 옷을 모두 벗긴 채 찬물로 샤워를 시켰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엄마로부터 외면당하고 학대당하는 아이가 늘어난다. 2018년 KOSIS(보건복지부, 학대 피해 아동보호 현황)에 의하면 24,604건의 아동학대가 있었는데 이는 2009년 5,685건보다 5배가량 늘었다. 미혼모의 출산과 출산한 아이를 키우지 못하고 버리거나 학대하는 준비되지 않은 엄마들도 늘어난다. 이런 형상들을 보면서 지금 우린 아이까지 상품화하거나 유희나 분풀이 대상화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말기적 위기 상황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문명의 말기적 현상은 인간 본능에 충실한 욕망의 과잉충족 현상으로 나타난 왜곡된 자기중심주의의 결과이다. 그것은 책임을 수반하지 않은 성적 행위와 쾌락의 추구와도 관련된다. 자본주의 문명이 가져다준 인간 본능 자극의 욕망 과잉 추구는 자녀의 출산도 섭리가 아닌 자기 결정권이라는 권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을 낳았다. 그 결과 이제는 낙태가 죄가 아닌 선택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물론 출산에 대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 존중이라는 명분도 좋지만, 생명 경시 풍조의 만연 등으로 이어질까 두렵다. 

 

이런 일련의 사태와 흐름을 보면서 우린 자유라는 이름으로, 권리라는 이름으로, 욕망의 유혹이라는 늪에서, 모성이 실종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세상에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일까? 누가 뭐래도 모성이 아닐까? 근원적으로 어머니에겐 자녀를 위해선 생명도 희생하는 간절함이 깃들여 있다. 나희덕 시인의 《뿌리에게》는 그 근원적인 모성의 위대함에 대하여 말하고 있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어린이날을 맞으면서 《뿌리에게》를 다시 읽는다.

  

뿌리에게 

나희덕(1966〜 )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나희덕, 『뿌리에게』, 창비, 1991>-

 

나희덕은 이 시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치열하게 시를 쓴 것 같다. 1991년 나희덕은 그동안 쓴 시 70편을 모아 창비에서 『뿌리에게』란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시집 『뿌리에게』는 2020년에 초판 23쇄를 찍어낼 정도로 인기가 있다. 나는 『뿌리에게』를 읽으며 이 시집이 사랑받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것은 아마 이 시집의 첫 번째 시로 등장하는 《뿌리에게》와 같이 시들에서 풍겨내는 모성의 강렬함 때문이었으리라.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로 시작하는 이 시는 흙과 뿌리의 관계성을 통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성을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흙과 뿌리는 재질이 다른 타자의 관계다. 그러나 둘이 관계를 형성할 때 타자의 영역을 떠나 한 몸이 된다. 적어도 흙의 입장에서는 뿌리를 받아들임으로써 흙의 존재 가치를 가지며 그것을 입증하는 길은 오직 뿌리를 성장시키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흙에게 뿌리는 타자를 떠나 나의 일부가 된다. 뿌리 또한 흙에 의해 흙과 하나가 된다. 

 

제1연은 뿌리를 향한 흙의 희생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에서 “깊은 곳”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희생적 모성이다.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는 잉태한 자녀, 나아가 삼라만상의 모든 모성이 잉태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네가”는 이 시의 전체에 흐르는 시적 대상인 뿌리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모성인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은 충분히 준비된 모성이며 생명을 잉태할 완벽한 채비가 되어있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흙인 모성은 뿌리(자녀)인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게 된다. “네 숨결 처음 대”인다는 것은 생명을 처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은 감격의 “더운 김”이 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흙인 나는 내 “밝은 피” 즉 너의 생명이 자라도록 풍부한 영양을 담은 사랑을 네게(뿌리=생명) 흘러보내며 즐거움에 떨게 된다. 생명의 잉태를 환희와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이다. 그래서 “아, 나의 사랑을”이라고 감탄사를 보낸다. 

 

제2연과 3연은 같은 맥락으로 뿌리의 강한 성장을 바라는 흙의 간절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제2연의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나를 뚫고 오르렴”이란 말에서 흙은 뿌리의 성장을 위한 희생이 준비되었음을 말한다.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이라 할 때 “도”라는 보조사는 ‘충족된 상태임에도’라는 의미와 통한다. “먼 우물”에 대하여 시인은 “먹을 수 있는 우물물”이라는 주서를 달았다. 그러니까 우물물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목마르다는 것이니 잉태된 생명(뿌리)이 성장을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네가 그토록 성장을 갈구하니 “나를 뚫고 오르렴”이라 한 것은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 흙인 나는 어떤 상태인가? 제1연의 “연한 흙”과 같은 맥락이다.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는 너에게 나의 모두를 내어 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즉 마음껏 나의 영양을 먹고 성장하라고 간절한 주문을 한다. 

 

여기서 시인은 “내 밝은 피”를 두 번이나 사용하며 강조했다. 피는 생명의 피이며 성장의 양분이다. 그런데 굳이 “밝은 피”라고 한 것은 그 피의 성질을 말한 것이다, 모성인 나의 피는 보통의 피가 아니라 깨끗하고 영양이 풍부한 피, 순결하고 지고한 피라는 것이다. 

 

아이를 가진 정상적인 어머니는 뱃속에서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느끼면서 마냥 꿈에 부푼다. 혹시 태아에게 지장을 줄까 싶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조심한다. 태아에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행동을 하려 애쓴다. 제3연은 바로 그런 모습이다.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은 사방으로 뻗어가는 뿌리의 모습 즉 뱃속에서 성장하는 태아의 모습이다. 태아가 발길질하며 요동을 쳐도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며/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너의 성장을 돕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 그릇”은 모든 것을 수용하여 감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불꽃 같은 바람”은 모성과 태아에게 닥치는 온갖 시련이다. 모든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모성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즉 뿌리(태아)의 성장을 바라보고 느끼는 흙(어머니)인 나는 그 성장을 축복하고 기뻐한다. 그런데 왜 그 기쁨을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이라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의 기쁨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리라. 

 

제2연과 제3연이 태아를 향한 모성이라면 제4연은 태아뿐 아니라 탄생 이후의 희생적 모성까지를 포함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제 뿌리는 성장을 가속화 하기 시작했다.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는 뿌리의 성장에 따라 흙은 영양을 뿌리에게 모두 주고 나니 그 연한 모습은 사라지고 거칠어지고 단단해져 간 모습 즉 태아와 자녀에게 사랑을 모두 주다 보니 거칠어지고 야위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래도 흙(어머니)은 마지막까지 뿌리(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비록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나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마지막 잔”까지 마셔달라고 뿌리(자녀)에게 당부한다. “마지막 잔”은 흙에 있는 에너지(영양분)의 모두를 의미한다. 모성의 완전한 희생이다.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는 모성의 희생적 사랑의 극치를 말하고 있다. 

 

뿌리는 성장하여 튼튼해지고 줄기와 잎들이 피어나고 뻗어간다. 그것은 자녀의 탄생과 성장과 같다. 자녀는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이란 영양을 먹고 성장을 하여 홀로서기를 한다. 제4연은 그런 모습이다. 그때 흙(어머니)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근원(원래의 모성)으로 돌아간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라 했으니 세월이 흘렀다. 뿌리는 완전한 성장을 이루었다. 회상해보니 그래도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즉 연약한 뿌리, 태아 혹은 어린아이였을 때는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이 많았다. 다시 말해서 뿌리(자녀)에게 줄 수 있는 영양분(에너지)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이니 줄 것이 없어 아쉽구나. 그래도 나(흙-어머니)는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다시 말해서 너(뿌리-자녀)의 왕성한 성장과 빛나는 성취를 보면 나(흙-어머니)는 기쁨으로 만족하고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흙은 다시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성장을 위해 준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장한 자녀의 어머니 걱정에 대한 위로의 의미와 어머니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어머니 되기의 길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에 나타난 특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시간의 흐름에 의한 뿌리와 흙의 변화 그리고 생명의 순환성이다. 뿌리(태아)는 애초에는 연약한 상태였다. 그 연약한 뿌리는 잘 갈구어진 연한 흙(풍부한 모성애)에 의해 생존의 힘을 키우고 그 영양(밝은 피)을 듬뿍 먹으며 자라 튼튼한 뿌리가 되고(자녀가 탄생하여 성장하고) 푸른 줄기까지 솟아 햇볕에 반짝이는 상태(자녀가 성장하여 세상에 각자의 성취를 이룬 상태)로의 변화이다. 즉 《연약한 뿌리→성장을 갈망하는 뿌리→성장을 거듭하는 뿌리→푸른 줄기 솟아 햇빛에 반짝이는 뿌리》로의 변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흙(모성)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준다. 

 

뿌리의 변화와 함께 흙의 변화도 진행된다. 흙(모성)은 초기에는 영양(밝은 피)이 풍부했다. 그러나 뿌리에게 다 내어주고 나니 남은 것이 없다. 남은 것이라곤 “거므스레 늙어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이며 “하나의 빈 그릇”뿐이다. 그것은 뿌리(자녀)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 소진된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쓴다. 여기서 흙의 모습은 생명의 탄생과 순환을 향한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 그 순환성은 《연한 흙(영양이 풍부한 모성)→착한 그릇→거므스레한 껍데기→빈 그릇→연한 흙》의 과정이다. “밝은 피”가 소진되었다가 다시 “밝은 피”로 충전되는 순환성이다.

  

둘째, 흙과 뿌리의 관계성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흙과 뿌리는 애초에는 타자였다. 그러나 관계성이 맺어지면서 하나가 되었고 흙은 뿌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 흙의 희생성이다. 관계성은 우선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어머니는 여자일 때 남자를 사랑으로 받아들여 생명을 잉태한다. 그리고 여자는 어머니로 변화된다. 그 생명은 어머니의 몸에 내린 뿌리이다. 그 생명 또한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탄생하고 성장한다. 더 확장하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멘토와 멘티의 관계 등으로 볼 수 있으나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생각된다. 

 

셋째, 인류의 모든 신화에서도 전통적인 관념에서도 흙은 모성의 상징이다. 여성의 근본은 생명을 포용하고 길러내는 희생적인 모성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여성의 근본을 모성주의에 두고 있음을 발견한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여성의 희생적 모성에 의해 생명력을 이어 왔음은 거역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진리이다.

  

여성은 모성이 강력하게 발휘될 때 위대해진다. 그것은 비단 결혼하여 아이를 탄생시켜야만 발휘되는 것만은 아니다. 유명한 테레사 수녀의 희생적 사랑도 어쩌면 위대한 모성의 발현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한 모성에 의해 탄생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우주를 관장하고 하늘과 땅의 통치자인 제우스 신도 어머니인 레아의 헌신적 사랑으로 탄생했다. 우주에 대한 항구적인 지배와 권력의지를 가진 신 크로노스는 태어나는 자녀들에게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태어나는 아이를 모두 삼킨다. 부인 레아는 마지막 여섯 번째 아이인 제우스까지 앗길 수 없어 태어난 제우스를 피신시키고 그 아기의 옷에 돌을 넣어 삼키게 하는 기치를 발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시 내각을 이끌었고 “베르사이유 조약”을 성사시킨 영국의 제34대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년〜1945년)의 어머니는 1863년 어느 추운 겨울밤, 갓난아기 데이비드를 안고 웨일즈 언덕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찬 추위와 눈보라가 닥쳤고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고 결국 자신은 알몸으로 얼어 숨진 어머니의 희생에 의해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농부에 의해 발견된 데이비드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하여 총리까지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옷을 입지 않았고 음식도 배불리 먹지 않았으며 하루 5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심훈(1901〜1936)의 오래된 소설 『불사조』(도딤문고 한국문학전집, 도디드, 2016)가 떠 오른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독일 유학파 김계훈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정희와 혼인을 한다. 계훈은 독일 유학 시절 사귄 주리아에게 유부남임을 속이고 결혼하여 함께 귀국한다. 그 바람에 아내 정희는 영문도 모르고 아들 영호와 생이별하며 시댁에서 쫓겨난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계훈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파산에 이르고, 정희는 아들 영호를 데리고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영호가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밤에 정희는 천사의 날개를 가진 불사조가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그래서 희생적 사랑에 기반을 둔 모성애는 불사조와 같다. 모성의 위대한 희생은 자녀를 통해 불사조처럼 재탄생한다. 

 

어린이날에 나희덕의 시 《뿌리에게》를 읽으며 모성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위대함에 감사한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물결에 그 위대성이 침식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는 마음이 아프다. 자본주의 문명은 인간에게 온갖 편의와 자유와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무한한 욕망의 추구와 본능을 자극하는 유혹에 의한 자유의 방임을 재촉하여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성찰 없는 욕망의 추구, 성찰 없는 자유의 추구 성찰 없는 문명 사용, 성찰 없는 정치의 탓이다. 모든 성찰 없는 문명은 자유와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고귀한 인간성을 파괴한다. 아동학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모성이 불사조처럼 살아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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