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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스토커 2》 편집된 욕망 채우기의 폭력

이상호 | 입력 : 2021/05/20 [09:29]

 

▲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뉴스파고

 

[이상호=천안아산경실련 공동대표] 2021년 3월 23일 한 청년이 서울 노원구에서 자신이 스토킹하던 여성의 집에 침입해 어머니와 여동생 등 세 모녀를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는 2020년 6월 대구의 한 고시원에서 발신번호제한 서비스를 이용해 피해자(당시 18세)에게 전화를 걸어 신음소리를 내는 등 추행을 했으며, 이후에도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비슷한 음성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그에게 성폭력처벌법 위반(통신매체 이용음란) 혐의로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선고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그는 세 모녀를 살해했다. 그러나 범행 당시만 해도 그를 감금하거나 처벌할 뚜렷한 법적 근거가 미약했다. 이 세 모녀가 살해된 다음날 국회는 스토킹 범죄 처벌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스토킹 범죄 처벌에 관한 법률은 1999년 처음 발의된 이후 2021년 2월까지 총 21회나 발의되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통과된 것이다. 사람들은 진작에 통과되었으면 그 세 모녀가 살해되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며 국회의원들의 정쟁과 직무유기를 질타한다. 

 

스토킹 범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문명사회로 올수록 각종 문명 매체가 가져다준 인간의 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선정성과 접근의 다양성, 은밀성 등에 의해 더욱 늘어나고 잔악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문명의 그림자를 걱정하면서도 문명의 유혹을 즐기며 그에 대한 대책에는 관심이 적었다. 현대의 스토킹 범죄는 문명의 그림자에 가려진 병리 현상의 한 종류이며 폭력이다. 신미균의 시 《스토커 2》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욕망의 집착과 자기중심적인 인식오류에서 자행하는 편집된 욕망 채우기의 폭력이 곧 스토킹임을 말하고 있다.

 

 

스토커 2 

-신미균(1955〜 )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새끼 고양이 배고플까 봐 

그런다면서 

입을 억지로 벌리고 

자기가 먹던 

땅콩버터를 먹인다. 

 

재미있게 놀아 준다고 

고양이 목을 잡고 

뱅뱅 돌린다 

 

축 늘어진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자꾸 뽀뽀를 한다 

 

추울까 봐 

자기 모자 속에 넣어 

꼭꼭 싸매 준다 

 

싸맨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간다고 

가방 속에 넣는다 

 

-신미균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 파란, 2020-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것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안에는 비극이 존재한다. 나만의 일방적인 생각과 행동의 끝은 어디일까? 그런 일방적인 생각과 행위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이 시를 읽으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일방통행과 자기 중심성의 폐해를 생각해 본다. 아울러 사람 간의 연대 의식이 희박해져 가는 문명사회에서 자기중심적인 소외와 유혹문화의 그늘을 보는 것 같다. 

 

시에서 ‘한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소외와 유혹문화에 빠진 현대의 숱한 사람들이다. 시는 그런 사람들의 행위를 사실적으로 진술해 갔다. 시에는 시인의 내밀한 관찰력과 내면의 사고가 숨어 있다. 그리고 스토커들의 폭력적 행동의 단계를 드러내고 있다. 스토커들은 처음에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접근하고 행동하지만, 결국에는 폭력으로 상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제1연에서 ‘새끼 고양이 배고플까 봐 입을 억지로 벌리고 자기가 먹던 땅콩버터를 먹이는’ 아이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근원과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면 심각하다. 아이가 ‘배고플까 봐 걱정하는 고양이’는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어린아이가 장난감 인형을 가지고 노는 행위에서 실제로 아이가 인형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행위를 관찰할 수 있다. 아이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빠져 인형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아이의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만약에 대상이 고양이(인형)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면 매우 심각해진다. 아이에게 왜 그렇게 먹이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아이는 계속 고양이가 배고플까 봐 그런다고 할 것이다. 

 

제2연에서 아이의 행동은 폭력으로 이어진다. 아이는 ‘고양이 목을 잡고 뱅뱅 돌리며’ 재미있어 할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에게도 “재미있지?”하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고양이는 점점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행위는 초․중학생들에게서 일어나는 학교폭력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친구를 사랑한다면서 헤드록을 하고 빙빙 돌리고 괴롭힌다. 문제가 되면 놀다가 장난으로 그랬다고 항변한다. 어떤 어른들은 ‘아이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 있지’하고 두둔한다. 이 또한 인식과 행동의 오류에서 발생하는 폭력적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3연에서 ‘축 늘어진 고양이를 사랑한다고 자꾸 뽀뽀를 하는’ 아이는 나만의 사랑에 빠져 있다. 고양이를 뱅뱅 돌리고 나니 자신도 힘들고 고양이도 힘들 것이다. 그래도 ‘널 사랑해’ 하면서 계속 뽀뽀를 해댄다. 그러나 고양이에게서 그 뽀뽀는 또 다른 고통의 연속임을 아이는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 행위는 제4연의 “추울까 봐 자기 모자 속에 넣어 꼭꼭 싸매 주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 왜곡된 인식에 기반을 둔 행위는 더욱 심화 된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행위는 제5연의 “싸맨 고양이를 집에 데리고 간다고 가방 속에 넣는” 행위에서 절정에 이른다. 고양이는 가방 속에서 질식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너를 사랑해서야’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의 그 행동은 결핍된 욕망의 투사에 불과하다.

  

아이는 왜 이런 행동을 사랑이라고 정당화할까? 우선 아이는 사랑의 결핍 속에 심심하다. 그 심심함이 고양이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투사되는 폭력을 유발한다. 그러나 아이는 폭력을 인지하지 못한다. 아이의 그런 행동에서 소외를 읽는다. 둘째, 아이는 고양이를 소유물로 생각한다. 고양이는 돈으로 사고 자기가 기르고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일종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고양이는 결핍된 욕망 충족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유희문화의 그늘을 읽는다. 셋째 사물과 대상의 존재와 관계의 인식오류에서 발생한 행동의 왜곡 현상이다. 아이는 모든 존재를 자기 스트레스 해소와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여길 수 있다. 아이는 자기의 행동이 치명적인 폭력임을 모르고 있다. 

 

스토커들은 아이와 같이 이 모든 특성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스토킹은 인간의 왜곡된 욕망의 집착에서 오는 폭력이다. 그들은 그런 행위의 결과가 상대는 물론 자신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고 있더라도 절제하지 못한다. 스토커들에게는 나는 존재하지만 너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존재론적 인식오류에 빠진 사람들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가치와 이유를 가진 개별자이다. 개별자로서 인간의 존재성은 천부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각자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타자의 존중만이 아니라 자기의 존중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존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만의 존재 욕망을 채우려는 존재론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심하면 각종 범죄를 일으키게 된다. 

 

시에서 한 아이는 자기의 개별적 존재성의 혼란을 겪으며, 고양이의 개별적 존재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고양이의 개별적 존재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아이는 고양이가 처할 고통을 인식하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토커들은 그런 존재인식의 오류에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보이고 '너'는 보이지 않으며, '나'의 욕망을 위해 '너'는 희생될 수 있는 개체가 된다. 그들은 공동체 속에 사는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감정의 교류를 통해 존중하고 절제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스토커들의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의 왜곡된 분출이다. 사랑은 상대의 존재(있음)를 인정하고 다가가는 감정의 교류상태이다. 여기에는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존재 간에는 ‘여백’이 있듯이 사랑에도 ‘여백’이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나무들이 각자 서 있으며 숲을 이루고 서로 바람과 속삭임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런 가운데 나무는 성장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인간사회의 존재와 사랑의 방식도 이와 같다. 사랑에는 반드시 ‘여백’이 있어야 한다. 여백이 없는 사랑은 일방통행이며 구속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욕망에 불과하다.

 

스토커들의 행위가 사랑이 될 수 없음은 사랑이 가진 ‘기다림의 여백’ 때문이다. 사랑에는 ‘기다림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내가 상대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보냈을 때 상대로부터 사랑의 감정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서 둘의 감정의 교류가 일어날 때 비로소 사랑은 싹트고 성숙에 이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 때문이다. 사랑은 기다림의 여백을 두고 인내하고 포용하는 심리 작용 안에서만 자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토커들에겐 그런 ‘기다림의 시간과 공간의 여백’이 없다. 그들에겐 욕망 충족의 초조함만 있다. 

 

사랑에도 초조함은 존재한다. 가령 카페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 출입문을 자주 쳐다보거나 입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거나 시계를 자주 보는 행위는 초조함의 발로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기다려주고 인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포용해준다. 그러나 스토커들이 가진 초조함은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초조함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기다림과 인내와 포용의 여백’이 없고 일방적인 소유의 욕망만 있을 뿐이다. 

 

짝사랑과 스토커의 행위는 근원부터 다르다. 짝사랑은 상대를 향한 나만의 사랑이다. 상대는 그 사랑을 모르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짝사랑에는 순수함과 여백이 있다. 그래서 짝사랑을 하는 사람은 김소월의 시 《먼 후일》에서처럼 끝없는 기다림이 있다. 짝사랑의 행위는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며 공격적이 아니라 수용적이다. 짝사랑에는 상대가 반응해 오지 않으면 자기의 사랑이 부족함을 자책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그것이 상사병이다. 진짜 짝사랑은 결코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읊은 것처럼 가는 님(반응없는 님)에게 ‘진달래꽃을 한 아름 뿌려주는 것’이다. 짝사랑에는 기다림과 절제와 포용의 여백이 존재한다. 그러나 스토커에게는 욕망만 있고 기다림과 절제가 없어 공격성이 발휘된다. 사랑은 욕망의 공격성에는 절대 뿌리 내리지 못한다. 

 

스토커들의 행위는 욕망을 향한 독점욕과 질투심, 초조함이 융합되어 나타나는 소유욕의 집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집착은 쾌락을 향한 폭력적 행위로 표출된다. 현대사회에서 스토커들이 늘어나는 것은 무한한 욕망과 유희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유혹의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욕망은 충족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속성이 있다. 특히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쾌락 욕망은 그런 속성이 더 강하다. 그리고 그 욕망의 지향은 지향하는 만큼 결핍을 가져오기 때문에 욕망에 목마르게 된다. 그래서 마약과 퇴폐적 성행위에 빠진 사람들은 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문명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것을 조장하고 은밀하게 만든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에 의하면,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인간을 <영혼을 위한 이익>이 아니라 <소유를 위한 이익>에 집중하도록 조장해 왔으며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욕망의 추구와 쾌락을 조장해 왔다. 자본주의적인 <소유를 위한 이익>을 위한 함의는 인간을 소유를 통한 자기만족과 쾌락에 충실한 존재로 변모시켜 왔다. 그래서 인간은 쾌락, 일, 윤리의 모순적인 조합에서 살며 항상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우선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자유가 극대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자본주의적 소유방식은 공유(共有)가 아니라 소유(所有)가 나를 존재하게 하며 만사를 내 뜻대로 할 수 있게 해주며, 내게 쾌락을 준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제 목표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가 되었다. 내 목표가 소유라면 나는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그 <존재>가 확실해지므르 나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나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고객은 속여야 하며 경쟁자를 없애야 하고 노동자를 착취해야 한다. 나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내 소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에리히 프롬 저, 김진홍 역 『소유냐 삶이냐』 홍익신서, 1978. 22쪽〜23쪽) 그런 자본주의적인 소유의 욕망은 폭력과 투쟁을 유발하며 엄청난 유혹문화를 조장한다. 

 

자본주의적 유혹문화는 소유와 쾌락의 추구라는 욕망이 자유의 추구라는 이름과 함께 발전되어 왔다. 그 유혹문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은 상품으로 전락하기도 하였고, 소유를 향한 집념으로 스스로 상품이 되기도 했다. 그런 유혹문화는 성적 유희와 쾌락을 조장하고 그 안에 폭력성을 내재하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그 폭력성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게도 했다. 그래서 그 폭력성은 항상 자본주의적 유혹문화의 사회․문화적 맥락의 은밀한 내면에 매복해 있다. 그리고 자유는 유혹과 범죄 사이에서 춤추게 되었다. 그런 가운에 욕망은 한없이 발동한다. 

 

유혹문화에 빠진 스토커들은 성장 과정부터 정상적인 사랑이 결핍된 사람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사랑의 결핍과 소외를 정상적인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결핍된 욕망의 충족에 매진한다. 스토커들은 채우지 못한 욕망을 성적인 욕망에 기반을 둔 유혹의 문화로 채우려 한다. 그들은 계속하여 성적 유혹문화를 탐닉하며 더 많은 결핍을 경험하며 그것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택한다. 스토커들은 그런 심리상태가 고착되었기에 치유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감시와 법적 대책, 치유의 노력이 필요하다. 

 

신미균의 시 《스토커 2》를 읽으며 욕망의 늪에 빠진 자본주의 유혹문화의 병폐를 성찰한다. 그리고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의 소설 『테스(Tess of D’Urbevilles)』를 떠 올렸다. 가진 자의 아들 알렉은 자신의 집에 일하러 온 테스를 유혹하여 욕망을 채우고 임신시킨다. 무책임한 알렉은 테스를 욕망 충족의 대상인 정부로만 취급하게 된다. 남편을 만나 행복한 삶을 꿈꾸던 테스는 분노에 알렉을 죽이고 체포되어 교수대에 오른다. 테스는 사회편견과 소유욕에 농락당하는 죄 없고 청순한 여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 죄 없던 청순한 여자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처형한다. 사람들이 소유와 욕망의 노예가 되어있는 한 지금도 수많은 <테스의 비극>이 탄생할 수 있다. 스토커는 정체성이 해체된 자이며 타인의 정체성까지 파멸시킨다. 테스는 알렉에 의해 정체성이 파멸되었다. 그들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사랑이란 가면을 쓰고 타인에게 다가가 욕망을 채우며 타인을 파멸시킨다. 시에서 아이에게 고양이는 소유물이다. 그러기에 아이의 행위는 스토커들처럼, 알렉이 테스를 대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우리는 그런 유혹문화와 왜곡된 자본주의적 소유욕에 둔감하고 심지어 거기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린 <존재의 방식>이 아니라 <소유의 방식>에 <영혼과 삶의 방식>이 아니라 <이익을 위한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2020년 한해 스토킹 범죄는 4,515건이었지만 488건만 처벌을 받았다. 그나마도 스토킹 처벌법이 없어 모두 경범죄 처벌법으로 처리됐다(동아일보 2021.4.10)”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스토커 폭력성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다양한 매체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스토커를 남녀 간의 성적 유혹과 폭력의 관계에서만 한정할 수 있을까? 자기가 싫어하는 연예인에게 계속 악성 댓글과 문자를 보내는 행위는 스토킹이 아닐까?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정치인에게 문자폭탄을 날리며 비난하는 행위는 스토킹이 아닐까? 우린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스토킹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정치인들은 무려 20년간이나 스토킹 범죄의 처벌법에 무감각했을까? 우리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자본주의적 소유욕과 유혹문화와 그것들에 무감각해진 우리의 의식구조와 일상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이 필요할 때이다. 스토커 없는 세상을 꿈꾼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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