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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세상읽기] 《바다에서 온 편지》, 절망과 혼돈의 세상에 던지는 간절한 희망의 메세지

이상호 | 입력 : 2022/11/14 [09:03]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뉴스파고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절망과 혼돈의 시대와 문학 

절망과 혼돈의 시대에 문학은 시대의 혼돈과 모순을 비판․고발하고 참여와 저항을 독려하는 문학이 성행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우리나라의 문학이 그랬다. 그러나 절망과 혼돈의 시대에 사람들이 바라는 메시지는 저항을 통한 정치적 변혁만이 아니다. 더욱 간절히 바라는 것은 혼돈과 모순 속에 상처난 마음을 위로하고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그런 시대에는 참여와 저항의 문학보다 더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문학이 있다. 그것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와 인간의 심연을 파고드는 서정적 메시지를 통해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문학이다. 혼돈과 모순에 빠진 영혼들은 심연 깊이 자리 잡은 종교적 심성이 발동되어 희망적 삶에 대한 기도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문학은 상처받은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고 영원을 향한 희망을 주는 서정적 문학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해인 수녀의 첫 시집 『민들레 영토』가 출간되고 난 후 30년이 지난 2005년 동아일보(2005년 10월 22일)가 조사한 지난 25년간 한해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의 기록을 보면, 법정 스님의 책이 9회, 이해인 수녀의 책이 11회로 이해인 수녀의 책이 최정상의 베스트셀러였다.(구중서, 『민들레 영토』 출간 30주년 기념의 글, 이해인 시전집 2, 문학 사상) 그 숱한 이해인 수녀의 시와 산문들은 상처받은 영혼들에 대한 치유의 기도와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상황과 테제는 달라졌지만, 절망과 혼돈은 1980년대와 2022년이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21세기의 문명의 시대, 첨단 산업 문명이 지배하는 세상에 정치적 집단과 국민은 더욱 공고하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팬덤이 된 상태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그때 우린 그랬다. 민주화만 되면 세상이 살만하고 데모도 없고 안정될 줄 알았다. 그런데 민주화된 지금도 시위와 갈등, 비판과 대립은 그때 못지않다. 다만 체류탄 연기만 사라진 것 같다. 

 

이런 고도화 시대에 많은 젊은이는 그때보다 더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간다. 여전히 삶은 절망과 희망의 교차점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처럼 지금도 이해인의 시 《바다에서 쓴 편지》는 희망을 향한 간절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삶에 대한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2) 바다에서 쓴 편지

 

 

바다에서 쓴 편지

 

이해인

짜디짠 소금물로 

내 안에 출렁이는 

나의 하느님 

오늘은 바다에 누워 

푸르디푸른 교향곡을 

들려주시는 하느님 

 

당신을 보면 

내가 살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내가 죽고 싶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당신을 맛보게 하는 일이 

하도 어려워 

살아갈수록 나의 기도는 

소금 맛을 잃어갑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 쓰고 

이내 잊어버리는 

찬장 속의 소금쯤으로나

당신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 사이에서 

나의 노래는 종종 희망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제발 

안 보이는 깊은 곳으로만 

가라앉아 계시지 말고 

더욱 짜디짠 

사랑의 바다로 일어서십시오. 

이 세상을 

희망의 소금물로 출렁이십시오. 

 

-이해인<바다에서 쓴 편지> 전문-

 

“짜디짠 소금물”은 입에는 쓰지만, 부패를 방지하고 영원으로 이끄는 하나님 음성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내면에 <짜디짠 소금물>을 이미 간직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께서 <푸르디푸른 교향곡>을 들려주시기만 하면 그 소금물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한 사형수가 막 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물구덩이가 있었다. 그는 그 물구덩이를 애써 피하면서 걸었다. 5분 후면 형장에서 죽을 몸이지만, 본능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가 발동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모순이다. 죽음 앞에서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살면서도 죽음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 삶을 살아낸다. 바라는 욕망이 충족되면 만족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욕망을 추구한다. 평화가 오면 모든 이들이 평화를 노래하며 지킬 줄 알았다. 그런데 평화가 와도 사람들은 서로 더 많은 재물과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다투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이다. 다만 그 의지가 어떻게 절제되고 발휘되느냐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쩌면 우린 그런 모순에서 삶을 살아내고 살아달라고 채찍질하는 하나님에게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른다. 구도자가 바라는 것은 스스로 절망을 딛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어진다. 그것을 다하지 못하면 죽어야 하고 죽고 싶어진다.

  

그런데 말이다. 힘들고 지친 시대 탓일까? 믿음의 균열 탓일까? “살아갈수록 나의 기도는 소금맛을 잃어”간다. 내 안에 있는 삶을 향한 기도의 힘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어쩌면 나의 의지는 “필요할 때만 찾아 쓰고 이내 잊어버리는 찬장 속의 소금쯤으로” 밖에 되지 못한 것 같고 내가 부르는 노래는 “종종 희망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바다에서 편지를 쓴다. “바다에서 쓴 편지”는 하나님께 전해져서 이렇게 게으르고 빛을 잃어가는 나에게 새로운 음성과 채찍으로 답해 주기를 바란다. 

 

나의 간절한 편지를 읽으신 하나님께서는 “제발 안 보이는 깊은 곳으로만 가라앉아 계시지 말고” “더욱 짜디짠 사랑의 바다로 일어서시고, 이 세상을 희망의 소금물로 출렁거려”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어서서 출렁일 때, 기도하는 나도, 기도하는 세상도 사랑과 희망으로 출렁일 것이다. 이 절망의 시대에 절망하는 영혼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짜디짠 소금과 같은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 사랑과 희망을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린 그런 사랑과 희망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고 삶으로 이끄는 짜디짠 소금물이다. 그것은 쓰지만, 마음을 치유하고 고귀한 영혼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 우린 어쩌면 그 짜디짠 소금물을 맛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린 기도하여야 한다. 하나님! 제발 그 짜디짠 소금물로 일어서서 출렁거려 달라고 말이다. 

 

이태원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축제라는 즐김의 자리에서 죽음이란 절망이 덮친 것이다. 그래서 한 자리, 한 시각에 축제와 죽음이 공존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그 시각 봉화의 광산에 두 명의 광부가 매몰되어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 곳에선 죽음이 아우성치는 사이, 한 곳에선 삶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였다. 정치적으로 서로의 호기를 찾기 위해 희생자들을 부각시키며 안간힘을 쓰는 사이, 매몰된 광부의 소식은 지하에서 사장되었다. 그것도 모순이다. 죽은 사람들을 두고 정치적으로 네 탓, 직무유기 등의 공방을 벌이며, 심지어는 정권 퇴진을 외치며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전투를 벌이는 사이, 절망에서 살아야 할 사람, 진정으로 살려내야 할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였다. 여기에 대다수의 국민도 공범이었다.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죽은 사람들의 목숨이 정치적 가치가 없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지하갱도에서 생사조차 모르는 두 명의 생명, 그들을 살리는 일은 이태원에서 죽은 사람들의 정치적 가치보다 훨씬 부족했기에 무관심했던 것 아닌가? 

 

3) 절망과 혼돈의 세상에 던지는 희망의 메세지 

 

그런데 221시간 만에 빛도 들지 않는 암울한 지하갱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작업 조장 박정하(62세)씨의 “처음부터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심금을 울리고 세상을 후려친다. 인간적 감수성이 있는 정치인들이라면, 그 한마디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기며 이 혼란과 대립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침착하고 당황하지 않는 삶의 자세, 그 올곧은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 그것이 ‘이태원의 죽음’을 바라보는 여야 정치인들의 가슴에서도 피어났으면 이처럼 혼란스러울까? 그들은 분명 제사보다 제사밥에만 관심이 있고 죽음의 본질보다 죽음이 주는 정치적 이해관계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그 사람들이 세상의 혼란을 잠재우고 바로 잡겠다고 자청하며 야단이다. 그것도 모순이다. 

 

사람들은 비판과 저항보다 희망과 기도가 있으면 살아낸다. 그래서 삶에는 비판과 저항보다 희망과 기도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절망의 시대에 비판과 저항의 참여문학보다 희망과 기도의 서정문학에 더 간절해지는 것과 같다. 

 

남극을 탐험한 세명의 탐험가가 있었다.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 로버트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어니스크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가 그들이었다. 아문센이 인류 최초로 남극에 깃발을 꽂아 남극 탐험의 영웅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보다는 스콧과 섀클턴을 더 많이 대화에 소환한다. 이유는 스콧과 섀클턴의 남극 탐험 이야기가 극렬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먼저 스콧과 탐험대원 8명은 1911년 12월 3번째의 남극 탐험 길에 올랐지만, 곧 연락이 두절된 후 1912년 11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그 옆에는 그가 쓰다 남긴 일기장이 있었는데 거기엔 “우리는 산 사람처럼 죽을 것이다. 불굴의 정신과 인내력이 남아 있을을 보여줄 것이다. 이 짧은 글과 우리의 시신이 그 이야기를 대신해 줄 것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영하 40도가 넘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였다. 1914년 11월 5일 어니스트 섀클턴 일행이 남극 탐험의 전초기지인 사우스조지아섬 그리드비켄 포경기지에 도착했다. 그의 당초 계획은 1915년 1월 이전에 남극 대륙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15년 1월 8일 그의 일행이 탄 인듀어런스호는 부빙(浮氷)에 갇혔다. 그러나 섀클턴과 대원 27명은 부빙에 갇혀 조난당한 채 1년 7개월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적으로 살아서 귀환했다. 뒷날 섀클턴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와 대원들은 남극 얼음 속에 2년이나 갇혀 살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위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물론 두 사람의 탐험 방법과 장비 등이 달랐다. 리더십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들을 살려낸 것과 살려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 하나 “안타깝지만 우리는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와 “우리는 단 한 번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다.” 에 있지 않았을까? 지하갱도에서 믹스 커피로 연명하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박정하 씨의 한마디 “처음부터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죽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란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절박한 것은 정치적 진영으로 나누어 서로 책임 공방과 규탄에 몰입하는 것보다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이며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사랑과 희망의 기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그들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현수막을 써 붙이지만,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 남은 가족들이 적어도 마음 놓고 순수하게 슬퍼할 시간마저도 빼앗는 것은 아닐까? 정말 중요한 것은 온 국민이 상처받은 마음과 희망을 치유하는 일 아닐까?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아우성치는 그들의 야만적 모순보다는 박정하 씨의 한 마디가 더욱 큰 치유의 메시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그들의 싸움에 사장되어 버렸다. 슬프다 이 시대가. 슬프다 이 대한민국이. 모두가 함께 이해인의 시 《바다에서 쓴 편지》를 읽고 그 의미를 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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