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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 세상 읽기] 우리 함께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이상호 | 입력 : 2022/11/22 [09:09]

 

▲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뉴스파고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 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지금 우리들의 우울한 일상

  

지금 우리들의 일상은 기쁜 날의 연속일까? 우울한 날의 연속일까? 

 

큰 인물의 특성은 모두 우울하다. 그 예로써 소크라테스, 플라톤, 헤라클레이토스, 모두 나이가 들어서도 우울하였다(프루타르코스 영웅전). 이들이 겪은 우울은 단순한 삶에 대한 회의나 절망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상의 우울을 감지하고 그 우울을 해결하기 위한 고통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우울을 겪으면서 그 우울을 극복하기 위한 고투 끝에 지혜와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내적인 성찰과 단련을 통해 발견한 성공과 행복의 법칙을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들은 모두 세상이 정의로워지고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들의 우울과 근심은 개인적인 이익을 넘어 정의롭고 밝은 세상을 위한 정화의 기도였다. 

 

가을이 다가오면서 큰 기대를 걸었다.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코로나 대책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땐 마음이 후련하고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였다. 여전히 마스크는 가지고 다녀야 하고 쓰고 벗기를 반복해야 한다. 코로나 19는 물러가는가 하더니 우리 곁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코로나 19는 고대의 샤만 사회에서의 마녀와 같다. 

 

연일 들려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우울한 소식이 대부분을 이룬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두고 난타전을 벌인다. 대장동 수사를 두고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이태원 참사를 두고 벌이는 공방은 역겹다. 거기엔 정치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지지한다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더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다. 속담에 ‘때리는 남편보다 말리는 시어머니가 더 밉다’는 말이 있듯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정치인들보다 그 대열에서 피 튀기듯 비난을 퍼붓는 편 가른 극렬 지지자들이 더 밉다. 창과 방패만 든 사람들만 남은 세상 같다. 아무리 시대에 맞지 않는다지만 전통적인 인간관계의 윤리와 질서는 파괴된 것 같다. 그들은 과연 어떤 철학과 신념으로 그런 행위를 할까? 그런 열정으로 추위가 엄습해오는 이 계절에 쪽방촌 사람들을 위한 봉사나 했으면 어떨까? 

 

대선이 다가오기는 오나 보다. 정치인들이 봉사활동 소식이 연일 날아든다. 그들은 진정 세상을 위한 마음에서 봉사활동을 할까? 이제는 봉사활동도 상당수가 이해타산에 맞아야 한다. 그런 봉사가 과연 봉사일까? 그들이 진정 어린 봉사자라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계산된 봉사에도 박수를 보내고 지지한다. 하기야 그런 봉사마저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해질까? 

 

지금도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는 일상이 우울이다. 치솟는 물가, 치솟는 금리, 불어나는 대출금 이자, 이는 생산자나 소비자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선 하루도 쉬지 않고 시위를 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시위라지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류가 터득해 온 지혜란 것을 보면 모두 이 우울을 이겨내기 위한 성찰이며 방법이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암울한 재난과 역경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기도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그것은 봉화 광산의 190m 지하 갱도 안에서도 ‘죽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박성하 씨의 말처럼 삶에 대한 외경과 기도였다. 우리가 살아낸다는 것은 우울 속에서도 삶에 대한 외경과 기도의 아름다운 덕택이 아닐까? 

 

2. 지금은 함께 아름다운 기도를 할 때

 

당신 앞엔 

많은 말이 필요 없겠지요. 하느님 

 

그래도 

기쁠 때엔 

말이 좀 더 많아지고 

슬플 때엔 

말이 적어집니다 

 

어쩌다 한 번씩 

마음의 문을 크게 열고 

큰 소리로 

웃어보는 것 

 

가슴 밑바닥까지 

강물이 넘치도록 

울어보는 것 

 

이 또한 

아름다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어도 

괜찮겠지요 

 

-이해인《아름다운 기도》 전문-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진실 앞에 선 사람들 역시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진실과 정의, 세상의 아름다운 동행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오직 진심을 다한 기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이해인의 시에서 그것을 느낀다. 

 

확신과 신념도 부족하고 자기도 잘 모르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거나 강요할 때에는 말이 많다고 한다. 나아가 왜곡된 가치관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때는 더욱 말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공자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여 말이 화려한 사람에게는 인(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 탓인지 말이 난무한다. 그 말속에는 거짓된 말 막말도 난무한다. 어느 말이 진실인지 구분하기가 참 어려운 세상이다.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세상은 절대 희망적이지 못하다. 거짓을 참처럼 속여 세상에 퍼트리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넘어 세상과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나쁜 바이러스다. 

 

사람들의 심리상 기쁠 때는 말이 많아지고 슬플 때는 적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소외되고 슬픈 이들을 위로할 때 중요한 것이 그의 말문을 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기쁠 때 보다 슬플 때 말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슬플 때는 함께 슬퍼 해주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데 말이 난무하면서 슬픔의 출처에 대한 공방에 정신이 없다.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지 비난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슬픔의 옆자리에서 축배를 든다. 그러니 참 어이없다. 

 

그래도 어찌하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어쩌다 한 번 마음의 문 크게 열고 큰 소리로 웃어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가슴 밑바닥까지 강물이 넘치도록 울어보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 이 시대에 와서 우린 언제 한 번이라도 눈물이 강물이 될 만큼 울어본 적이 있는가? 요즈음은 상갓집에서도 희희락락(嬉嬉樂樂)한다. 마음의 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은 탓이리라. 앞문이 아니라 뒷문이나 쪽문이 열린 탓이리라. 중요한 것은 마음의 앞문을 여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의 문이 아니라 진실의 문이 열려야 한다. “마음의 문 크게 연”다는 것은 바로 내면 깊숙이 있는 진실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그래야 실컷 웃고 실컷 울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기도는 진실한 마음을 내보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기도가 된다. 진실한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기도는 아름다운 기도가 아니라 음흉한 기도이다. 따라서 이해관계와 욕망의 마음이 아니라 양심과 정의의 마음이어야 한다. “마음의 문 크게 연” 웃음과 울음은 그런 것이어야 아름다운 기도가 된다. 

 

가장 천진한 웃음은 어린아이의 웃음이듯이 가장 아름다운 울음 또한 어린아이의 울음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웃음과 울음에는 이해타산과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게 믿어도 괜찮겠지요?” 하느님. 이 말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애교가 묻어난다. 정말 아름다운 기도는 그런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3. 아름다운 호혜 세상을 위하여

  

애덤 스미스와 벤담 같은 이들은 무한 자유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익의 극대화 법칙이 작용한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삶에서 느끼는 보람은 대부분 그 무한대의 자유와 이익의 추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삶의 도리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을 때였다. 인간은 무한 자유와 이익의 극대화란 욕망을 추구함과 동시에 의리, 공정, 배려, 존엄 등과 같은 호혜적 의무의 이행을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이 전자에 몰입할 때 그는 만족을 얻지 못하고 투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후자에 몰입할 때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이 일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때 그 집을 꼭 샀어야 했어.” “주식을 그때 팔지 말았어야 했어”와 같은 경제적 실수에 대한 후회일까? “아내와 자녀들에게 혹은 부모님께 잘못한 행동에 대한 후회일까?” 사람은 일생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를 하지만 정작 가슴에 응어리가 지는 실수와 후회는 그런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욕망을 채우지 못한 데서 오는 실수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책무와 도리를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후회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유와 자본 만능의 사회는 욕망의 극대화에 몰입하는 ‘사이코패스 인간형’이 공리주의의 경제와 정치이론의 초석이 되었다.(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김홍식 옮김, 까치) 그래서일까? 정치인들은 저마다 국민의 이익의 극대화만 부르짖는다. 그리고 국민도 그것에 몰입하고 환호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울해지고 불안에 떤다.

  

한 개인이나 사회, 국가나 인류의 트랜드가 인간에 대한 이해의 초석이 자유와 이익의 극대화에 집중되었느냐, 존중과 배려의 호혜적 의무와 윤리에 집중되었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전자에 몰입하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투쟁의 장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전에 그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런 사회는 투쟁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후자에 몰입하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살만한 세상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것에 몰입하고 있을까? 만약 전자라면 우리 사회는 분명 위험한 사회이다. 후자라면 희망적이다. 우리의 자본주의가 전자에 속한다면 천박한 자유와 자본주의사회이다. 후자라면 인간다운 삶이 가꾸어지는 복지사회이다. 그런데 날마다 이토록 비난과 우울이 난무하고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와 권력에 집중하는 한국 사회를 어찌 전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야 할 정치인들이 그 앞장에 서서 진두지휘하고 많은 국민도 편을 갈라 창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있다. 서로 자기는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마음을 열라고 강요한다. 그러니 분명 사이코패스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다. 그래서 우울하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앞서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 위대한 국가들이 모두 우울한 사회에서 우울을 겪으면서 내적 성찰과 단련을 통해 그 우울을 이겨냄으로써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듯이 우리도 이 우울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호혜적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호혜적 사회를 위해서는 이해인의 시 《아름다운 기도》에서처럼 “마음의 문을 크게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유와 이익의 극대화를 넘어서는 존중과 배려, 화합과 공존이라는 호혜적 윤리와 책무를 회복하는데 함께 노력하여야 한다. 그것은 자유와 이익의 극대화보다 훨씬 소중한 인간의 의무이자. 가치이다. 우리 함께 《아름다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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