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피해자 증언 ⑱ "5공 청산이 안된 정치는 도루묵이다"

뉴스파고 | 입력 : 2015/01/07 [22:57]

                                                             삼청교육대 인권운동연합 공동대표 김0진

 

삼청교육대는 너무 가혹한 이 나라의 정치 모순이며 전두환씨는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전직 대통령으로서 나라의 체면이 여러 가지로 불분명한 피해를 끼치고 있다.

 

회상컨대, 내가 1980년 8월 6일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원인은 제 5공화국의 3선 개헌정국에 이어진 그 당시 여당 국회의원들의 사사로운 권세가 등등했던 경찰권의 악용에 있었다.

 

1980년 8월 14일 나는 저돌적으로 요구했던 심사를 거쳐 창원예비사단에 출소했으나, 삭발된 심신은 전신이 상처투성이고 내 어릴적 일제 말 북만주에서 발견한 조국을 찾아 헤매던 어린 독립투쟁의 시계는 정지되고 말았다. 

 

많은 피해국민이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반항이라고 맞아 죽는 것을 수 없이 보았고, 죽지 않고 살아나온 나는 기나긴 세월이 고통이므로 죽는 것 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나의 젊은 시절은 조국파 민족을 위한 이 나라 국군 장교로서 자유당의 썩어 빠진 군수 부정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다가 군수품 부정처분 주범이 고등법원회의와 결탁하고 그 범죄를 나에게 둘러씌우는 일방적인 강제비밀판결문을 나도 모르게 조작하여 두었다가, 그것을 4.19 이후의 무능 정부가 들추어 내어 육군 중위 특명에 의해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었으나 군법은 재심이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 제 2건국 즈음하여 나는 청와대에 진정하고 육군참모총장이 재심청구함이 옳다는 육군고등검찰의 회신에 의하여 1998년 11월에 제출한 재심청구는 정당한 법에 따른 사실 조차 없이 대법원에서 기각하는 그 사유가 재심청구인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부당한 사유라 재재심청구했으나 오리무중이다.

 

“인생칠십 고래회라!”

 

일제 말 북만주의 14세의 항일투쟁 소년으로서 노년에 나의 정의마저 되찾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래도 나는 머나먼 조국을 찾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내 고향만이라도 세계에서 제일 잘사는 풍요로운 농어촌을... 유일한 내 꿈으로 1969년 우리 고향의 초등학교 분교설립 추진위원회 총무로서 본교 교장에게 교섭하고 여당 국회의원은 물론 그의 친척에게도 정당한 민의 숙원으로 협의했으나, 본교 교장의 분교설립 동의서 날인 받은 것을 폭력이라고 나를 고발하여 집행유예까지 받았다.

 

지역주민의 숙원인 초등교육의 백년대계를 교섭하는 나의 정의를 폭력으로 몰아가는 법치국가의 현실이 안타까웠으나, 묵묵히 그 학교를 인가 받아 학생들이 졸업하는 11년이 지난 1980년에 파렴치범도 아닌 나를 전과자라고 잡아가둔 ‘삼청교육대’나 공권력이 난무하던 제4공화국과 썩어 빠진 자유당과 무엇이 다를까?

 

나를 고향에서도 못살게 쫓아내던 삼청교육대에 의하여 독립투쟁 소년의 시계가 멈추어진 20년만에 6.15 남북 공동선언은 나에게 오아시스와 같다. 우리들의 비극이 이 정도로 끝났으면 노태우씨의 5공 청산의지를 당국은 실천하고 삼청교육대 피해 배상도 광주사태와 같이 처리해야 옳다.

 

그런데 여소야대 정국하에 어느 야당도 여당이 책정한 보상보다 더 많이 받아준다고 하고 야당의 삼청교육 특별법 의안을 반대하던 야당이 3당 통합으로 저들끼리 선심을 다 쓰고, 인권부재 부정부패 정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총체적인 난국이다.

 

국민의 정부는 인권국이라는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피맺히고 한맺힌 5공 청산을 마무리하는 삼청교육 명예회복 피해배상을 속히 하기 바란다.

20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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