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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균=협성대학교 객원교수] 1897년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한 이후, 1910년 일본 침략에 저항은커녕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주권을 빼앗긴 채, 국민은 36년이라는 암흑기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야 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여 식민지로 삼고, 그에 항거할 유일한 세력을 조선 민족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하여 온 불교의 승려들로 본 것 같다.
조선불교는 숭유억불(崇儒抑佛)에 의하여 탄압을 받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 국토가 왜군으로부터 유린당할 때, 서산대사인 휴정(休靜)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승병을 모았고, 그를 이어 제자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처영(處英) 그리고 영규(靈圭)도 승려를 규합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사명대사는 조선의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대일 강화교섭을 통해 전란 당시 일본으로 잡혀간 3천5백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귀국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
1876년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에 따라 개항한 이후, 일본불교는 일본의 대외진출정책에 적극·호응하며 승려들이 경쟁적으로 조선 침략의 첨병 역할을 했다. 일본불교는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일본의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 발양을 도모해야 한다.’라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1898년대 조선개교사 오촌원심(奧村圓心)이 동경 본산에 제출한 ‘광주(光州) 개교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과 한국은 진치(唇齒)와 같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동방(東邦)의 형세는 날로 악화하고 조선은 바야흐로 말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이때를 당하여 우리도 왕법위본(王法爲本)·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교를 가지고 피 국민을 유도 계발함은 실로 우리 교의 본지(本旨)이다.라고 했다(加藤文敎,≪朝鮮開敎論≫, 東京, 1900, 20∼21쪽 : 네이버, 우리 역사 넷, history.go.kr). 이 당시 일본불교는 대외정책의 앞잡이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고 있었고, 일본 정부에서도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안심하고 일본불교계에 맡겨 두었다(네이버, 우리 역사 넷 history.go.kr).
한국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전파되어 고려 시대에는 호국불교로서 융성했던 시기를 거쳐 조선 시대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사회 발전과 가족의 건강과 자식이 잘되길 기원하는 구복(求福) 종교로서 민족의 생활 속에 융성해 왔다.
일본은 조선 침략에 있어 조선불교의 승려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최선봉의 저항세력이라 믿었다. 한편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이 한양의 도성 출입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등 멸시와 탄압을 받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조선총독부 비호 아래 일본의 조선개교사들은 조선 승려와 일본 승려와의 친선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을 유람시키며 개종과 회유도 했다. 그리고 일본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불교 문화를 조선불교 문화에 접목하여, 조선의 선종 중심의 불교 문화를 일본식 밀교 불교 문화로 변질시켰다. 심지어, 조선총독부는 조선 승려의 결혼을 권유·유인하며 조선불교의 전통을 일본식 불교로 교화·개종을 통해 식민지 저항세력의 말살 정책을 펼쳤다. 이것은 해방 후 불교혁신총연맹이 조직되고 선학원 등이 이에 참여하여 대처승을 불교의 중심부에서 배제하는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의 촉발·원인이 되었다. 식민지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사람을 격멸하고 무시하고 더럽다는 표현의 의미로 ‘부다(豚 : ぶた : 돼지)’라고도 했다고 한다.
한국은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정치·경제 등 사회적 혼란의 안정이 채 되기도 전에 한국전쟁(1950∼1953년)이 발발하여 비극적인 엄청난 인명 살상이 일어나고 산업시설은 완전히 파괴되고 전 국토는 황페화하였다.
영국의 타임스 기자는 1951년 10월 기사를 통해 “한국에서 건전한 민주주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보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It would be more reasonable to expected to find roses growing on a garbage heap than a healthy democracy rising out of the ruins of Korea).”라고 썼다. 그리고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어페어’지는 1960년 10월호에서 한국에 대해 “실업자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0달러 이하, 수출은 2,0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한국의 경제 기적 가능성은 전혀 없다”라고 했다. 1960년에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로 몹시 가난한 국가였다.
그러나 한국은 가난하고 힘들고 암울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급속한 경제발전과 성장을 이룩한 결과, 1993년 세계은행은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은 ‘동아시아의 기적(East Asian Miracle)’이라고 극찬하였다(강성진, 경제발전론, 박영사, 2018. p.5.). 한국은 1996년에 선진국 그룹인 OECD에 가입하였고, 2010년 1월부터 OECD의 원조공여국 개발원조위원회(DAC :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정식 회원국이 되어 그동안 대외원조를 받던 가난한 국가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전환되었다. 2011년에는 2만2000달러를 넘어 한국은 2012년 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의미하는 소위 ‘20∼50클럽’에 세계 일곱 번째로 가입했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과 성장을 이룩하여 현재는 선진국이 되었고 경제 규모도 세계 10위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무역은 1947년 2월 소금과 생고무 등을 실은 무역선인 ‘페리우드’호가 인천항에 들어오면서 최초로 시작되었다. 1947년 한국의 수출액은 2천7백만 달러, 수입은 2억3천3백만 달러였다. 2021년 수출액은 6,445.4억 달러, 수입액은 6,150.5억 달러를 기록하며 수출과 수입이 각각 23,870.9%, 2,638.7% 증가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 국민은 해마다 봄철이 되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이 나고, 보리가 완전히 여물기도 전에 풋보리를 베어다가 배고픔을 이겨내는 힘든 보릿고개를 겪었다. 이를 춘궁기(春窮期)라 했고, 많은 국민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견디는 처절한 생활로 인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한 일부 국민은 부황병(浮黃病)에 시달리기도 했다. 굶주림은 논의 벼가 익어가는 가을철에도 있었다. 햅쌀이 나오기도 전에 보리쌀이 떨어지면 덜 익은 무른 벼 이삭을 베어 증기로 찐다. 증기로 찐 벼를 말려 방아나 절구로 찧은 햅쌀로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추석의 차례도 지냈다. 이 쌀을 충청도 지역에서는 ‘찌갱이 쌀’이라 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오리 쌀’이라고 했다.
특히,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필자가 아주 어릴 때 동네잔치나 초상이 나면, 어떻게 알고 어김없이 어디선가 떼 지어 찾아오는 거지들 또, 어떤 일부 상이군인들은 하루 멀다 수시로 찾아와 쌀이나 보리 등을 내놓으라며 지팡이 등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내가 왜 이렇게 팔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신세가 되었는지 아느냐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위협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어린 내가 놀랄까 봐 얼른 방에 들어가라며, 우리도 먹을 것이 없다고 사정도 하고 고성도 오가고, 또 무엇인가 내려치는 쿵 소리와 함께 마당의 개도 깨갱거리는 등의 난리법석이 한참 벌어진다. 방안에서 너무 무서워 불안해 벌벌 떨고 있다가 한참 후에 밖이 조용해지면,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나와 엄마 괜찮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사람을 툭툭 건드리고 또 때리는 것도 자유라고 했다.
이때 우리 사회는 너무 무질서하고 불안정하고 먹고 사는 것 자체가 극히 힘들고 암울했던 시기였다. 국민의 대부분은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런 가난한 국가였다. 암흑기 같은 일제식민지를 거쳐 비극적이고 처참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춘궁기를 겪은 세대는 정말로 나라가 잘못되면 국민 전체가 극심한 빈곤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을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불공평한 것은 어떤 집안에 태어나느냐보다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인 것 같다(김세직, 모방과 창조, 브라이트, 2021, p.21).
1961년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남과 동시에 위와 같은 무질서한 사회 현상들이 사라지고, 우리 사회는 서서히 안정과 질서를 찾으며, 절망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국민은 열심히 일하고, 근면 절약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의 사회로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를 기점으로 그전에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가난을 후세에게 되 물려줄 수 밖에 없는 그런 국가였다. 그러나 1960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하였던 국가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현재는 30,000달러가 넘는 부유하고 잘사는 선진국이 되었다.
1960년대 초등학교 입학 당시 어린이들은 거의 모두가 검정 고무신이고, 코를 너무 많이 흘려 가슴에 콧물 닦는 수건을 달고, 왼쪽과 오른쪽 옷 소매는 나오는 코를 많이 닦아 번질거리기도 했다. 식목일에는 학교에 삽을 가지고 가 학교 주변과 산에 나무도 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함께 칡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단체로 송충이도 잡고, 정부가 전 국민 쥐잡기 운동을 전개하며 죽은 쥐꼬리도 모아 학교에 가져가고, 학교 운동장의 한 곳에는 고구마와 고추 등도 심고 토끼도 키우고, 가을철에는 수확이 끝난 논에 떨어진 벼 이삭을 주우러 다녔다. 비료의 부족과 농약이 거의 없어 퇴비와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여 가꾼 농산물의 섭취로 기생충이 만연해 일 년에 두 번 정도 회충약도 먹었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날에는 김밥과 달걀 등을 준비하여 온 동네 마을 사람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유일한 지역축제 장소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그때는 겨울철에 삼한사온이 뚜렷했고, 눈도 많이 오고 몹시 추웠던 것 같았다. 등굣길에 눈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파헤치며 눈길을 걷다 보면 고무신 속에 물이 질퍽거리고 운동화도 다 젖었다. 몹시 차갑고 시리고 어른 발을 동동거리며 교실 문을 열고 책보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난로 가로 갔다. 조개탄으로 달구어진 따스한 난로에 손도 녹이고 가끔 차가운 발을 따뜻하게 하려다 젖은 나일론 양말에 구멍도 났다. 수업 시작 쇠 종 소리가 땡땡땡 울리고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시면 어김 없이 창문 열어, 왜 냄새가 그리 지독하냐? 또 난로 위에 도시락이 층층이 쌓여 맨 밑의 도시락의 밥은 타기도 하고, 난로 옆에 앉은 학생이 도시락을 위아래로 바꾸다 실수로 교실 바닥에 도시락이 떨어지는 소리라도 나면, 점심을 굶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눈초리는 모두 난로로 향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농촌이든 도시든 난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물을 대기 싫어 얼굴은 고양이 세수하고, 목에는 때가 꼬질꼬질, 손도 트고 선생님은 수시로 때 검사도 하고, 또 머리도 제대로 감지 않아 찌든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내복은 한번 입으면 갈아입을 경제적 여력이 없어 한해 겨울이 지나서야 세탁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여학생들의 긴 머릿속에는 서캐가 많이 생겨 수시로 극적 거리고, 또 이를 박멸한다고 디디티를 뿌리고, 머리에는 기계 독(머리피부염)이 번지고 몸에는 종기도 많이 나고, 간혹 얼굴이나 머리 등에 도장 모양처럼 둥그런 도장 버짐이 생기면 치료 약을 구하기 힘들어, 싸리나무를 베어 작게 토막 내어 불 속에 넣으면, 달구어진 나무 속에서 뜨거운 즙이 나온다. 그것을 버짐이 난 곳에 발랐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미국의 원조 물자로 지원된 분말 우유와 강냉이 가루를 섞어 만든 빵을 배급받아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것도 매일 배급을 받은 것도 아니고 격일로 먹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195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한국 사람들은 진흙집(미국은 가축 축사)에서 살고, 각 집에는 까만 곰팡이가 잔뜩 낀 사각형의 덩어리(메주)가 걸려있는 것을 목격하고, 한국인들의 생활상이 너무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 놓여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했다. 그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을 다시 찾은 그의 글에서, 1950년대 한국인들이 각 가정에서 생활 용기로 도자기를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며, 그 당시 한국의 도자기 수집 생각을 못 하였던 점을 못 내 아쉬워했다.
현재 60대 중반 이후의 세대는 어릴 때의 가정은 대부분 대가족으로, 조부모·부모와 함께 배고픔의 설움을 겪고 극복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며 풍요로운 사회를 동시에 경험했을 것 같다.
1962년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종합계획에 의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필두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의 추진과 함께 국민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최우선 해결과제로 삼은 식량 증산 계획의 성공으로 한 많은 보릿고개는 해결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국민은 정부의 경제정책을 신뢰하고 협력하며 급속한 경제의 발전과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고 본다.
당시는 자전거는커녕 사람도 다니기조차 어려운 좁디좁고 꼬불꼬불한 마을 오솔길을 넓히고, 매년 가을철에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의 번거로운 단장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가옥도 흙벽돌에서 시멘트로 개량하고, 석유를 사용하던 등잔불은 전기로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도시의 공동화장실 앞에서 빨리 나오길 초조하게 기다리며 길게 줄 서는 광경도 사라지고, 동네 공동 우물 대신 각 가정에 우물을 파고 또 수돗물을 공급하고, 난방의 땔감을 나무 대신 연탄보일러로 대체하였다. 국민의 생활환경이 하루 하루 쾌적하고 편리한 삶의 터전으로 변화되고, 소득이 증대되는 등은 “잘살아보자”라는 구호 아래 전개된 새마을 운동의 성공적인 결과라 본다. 이 운동의 성공은 국민 각자가 근검절약하며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준 의식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정부의 공업화 정책은 각 가정의 커다란 진공관 스피커와 라디오 대신 아주 소형이지만 성능 좋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채워지고, 흑백 TV(1960년대 현재 LG전자의 전신 금성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흑백 TV 개발 판매, 그 당시 1대당 가격 약 쌀 10가마 정도, 공급은 적고 수요는 많아 신청받아 입찰로 판매)는 1960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동네에서 형편이 좀 나은 가정에서만 볼 수 있었다. 당시 김일의 일본 선수와 레슬링 시합, 권투경기 및 국제축구대회 등 국가 대항 전 중계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으로 몰려가 TV를 보면서 대한민국 선수 이겨라고 목청껏 소리 지르고 박수치며 응원하는 광경도 있었다. 또 어느 날 농촌의 동네 이장 집에 전화기도 놓였다. 이장이 아아! 누구의 댁 아들·딸의 전화가 왔다는 마이크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면 일손을 멈추고 달려가곤 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출생한 세대는 베이 붐 세대로, 그 출생인구는 매년 3%씩 증가했다. 1960년 어린이의 사망률은 1,000명당 14.2명으로 매우 높았고, 태어난 아이는 홍역을 무사히 치러야 호적에 올리는 비참한 시기였다. 정부는 국민이 먹고사는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이에 따른 사회·경제·교육·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필요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1960∼1970년대에 ‘3·3·35운동’ 등 산아제한정책을 통하여 ‘많이 낳고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구호로,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까지 낳고 단산하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까지 계속된 산아제한정책은 우리 강산 초만원이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튼튼하게 잘 키우자.” 우량아 선발 대회도 있었다. 향토예비군 훈련 날에는 보건소의 간호사들이 꼭 나타나 상냥한 미소와 말투로 너무 많이 낳아 고생하지 말라며, 훈련 대신 정관 수술을 권유하는 산아제한의 운동이 훈련장에서도 벌어졌다.
그리고 한국인은 조상 대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쌀과 인생을 함께 평생 살아간다. 출산한 산모는 흰쌀밥과 미역국을 먹고, 아이의 백일 상에는 흰쌀밥과 백설기가 놓이고, 생일날에는 흰쌀밥과 미역국, 봄가을 초풍 날에는 흰쌀밥의 김밥 도시락, 설날에는 흰쌀로 만든 떡국이 제례 음식으로 준비되고, 추석에는 햅쌀로 송편을 빚고 제사상에는 흰쌀밥을 가득 담은 밥그릇이 올라간다.
조선 후기(18세기 말)학자 이덕무(李德懋)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보통사람은 한 끼에 5홉, 양이 큰 남자는 7홉을 먹고, 아이는 3홉을 먹는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5홉은 0.5되 정도로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밥그릇의 2∼3배에 달하는 양이다. ‘한 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 중 하나인 <은자의 나라 한국>에,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인의 식습관을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식사를 많이 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것이며, 잔치의 평가는 음식의 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양에 있으며 말을 하다가는 한입 가득히 먹을 수가 없으므로 식사 중에는 거의 말이 없다.”라고 했다(쌀의 만족, GOLD & WISE, October 2022, p.9∼10). 당시 조선인들은 밥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농사짓는 농부는 해 뜨면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다가 해가 져야 집에 돌아오는 힘들고 고된 일로, 힘은 밥에 나온다고 했듯이 밥을 많이 먹지 않으면 고된 일을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1960년대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고 쌀의 생산량은 답보상태로 식량이 매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당시 빈곤의 악순환(vicious circle of poverty)을 벗어나기 위해 식량난 및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하라고 농촌진흥청에 지시를 내렸고, 당시 농촌진흥청은 “잘 자라나는 쌀을 만들면 된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서울대학교의 생물학자 허문회 교수 주도로 연구하도록 하여, 인디카 종(장립종) 쌀과 자포니카 종(단립종) 쌀의 교배에 성공하여 새로 나온 벼 품종이 “통일벼”다(네이버 : CC BY-NC-SA 2.0 KR). 통일벼는 종전 재배하던 벼보다 생산량이 40%가량 늘어나 1976년 쌀 자급자족 노력에 성공했다. 1977년에는 쌀 생산량이 4천만 석을 돌파하여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다수확국가의 반열에도 오르기도 했다. 그간 14년 동안 쌀막걸리 제조금지조치는 1977년 12월에 해제·허가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오던 한국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굉장히 힘들어졌다. 정부는 경제의 돌파구를 찾아내야 했다. 농업 종사자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농산물의 수출상품화였다. 1950년대 땅속의 흑연과 같은 광물을 캐내어 수출하던 시대에서 1960년대는 땅 위에 곡물을 심고 누에를 키워 실을 지어내다 파는 것이었다. 1959년의 수출총액은 2천만 달러를 밑돌아 국민 1인당 수출액이 1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1961년에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생사가 국내수요를 충당하고도 270만 달러어치가 수출되어 수출 3위 품목이 되었다.
누에 알은 까마면서 참깨보다 훨씬 더 작다. 그 까만 알을 보자기로 싸 따스한 곳에 놓고 약 10∼12일 정도 지나면 부화 된다. 누에치기는 힘든 일이지만, 봄에는 뽕나무를 베어다가 먹이로 주기 때문에 그래도 좀 낫다. 가을에는 뽕잎을 하나하나 따다 먹이로 주어야 하므로 일손이 많이 필요하고 손가락에 끼는 뽕잎 따는 칼로 인하여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트기도 했다. 누에는 네 번 잠을 잔다. 세 번째 잠을 자고 나면 뽕잎을 엄청나게 많이 먹으며 그 자그마한 누에도 뽕잎 먹는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누에 치기는 고달프고 힘은 들었지만, 농촌에서는 목돈을 마련하여 저축도 하고 자식들 수업료와 육성회비도 냈다. 당시 정부는 산을 개간하고 밭에 뽕나무를 심으면 밀가루도 주는 등 누에 치기를 장려했다.
필자가 1962년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동네 뽕나무밭 조성단지(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중척리 일원의 들)에 그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축하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온 힘을 다하여 행사장으로 친구들과 함께 달려 도착했을 때, 박정희 최고의장은 행사를 끝내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그 후 6년이 지난 1968년 4월 1일 중학교 1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대전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향토예비군 창설기념식 참석차 대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전 시내 도로변에 모인 많은 환영 인파를 향하여 승용차 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박 대통령의 얼굴과 육영수 영부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1910년부터 36년간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암울한 시기를 보냈던 우리 국민은, 또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인명피해와 함께 생사를 알 수도 없고 만나볼 수조차도 없는 많은 이산가족의 비애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봄철에는 양식이 떨어져 굶으면서 보리가 빨리 익기를 학수고대하며 나날을 보내야 했던 서글프고 비참했던 시절에, 너무 가난하여 아이가 아프고 어른이 질병에 시달려도 병원에 갈 엄두조차도 낼 수 없었던 고통스럽고 암울했던 시대의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의 국가들이 부러워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은 국민 각자가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불러일으킨 의식개혁의 변곡점이 되었던 것 같다. 또 정부는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통해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로 홍보하고, 가을이면 혈액 용액제(징코민)의 원료로 쓰이는 은행잎도 모으고, 소변도 당뇨약의 원료로 쓰인다며 공중화장실에 소변 받는 통도 놓여있었다. 또 박정희 정부는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과 그 가족을 위해 복지제도의 일환인 의료보험제도를 먼저 도입·실시하고 이를 점점 전 국민에게 확대하여 병원비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들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불교 승려들은 대한제국 침탈의 첨병 역할을 했으며 1910년 일본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36년간 온갖 수탈정책의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건설한 공업지대는 북한지역에 집중되었고, 그나마 남한지역의 공업시설 및 인프라는 한국전쟁 중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정부의 예산은 차입과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특히 1949년 예산편성에서 조세수입은 10.8%, 원조자금 13.9% 및 차입금 46.4%로 빚더미 재정이었다. 미국의 원조자금은 1954∼1961년까지 총 20억8,800만 달러로 총 재정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49.5%까지 이르렀다.
한국에 대한 최초의 원조는 점령지의 긴급구호를 위해 제공되는 미국의 GARIOA원조(Government Appropriations and Relief in Occupied Areas : 점령지역구제기금)였다. 이 원조로 도입된 물자는 식료품·의류·의약품 등으로 주로 해방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에 도움을 주며 사회적 혼란의 수습 목적으로 미 군정이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해외차관은 1947년 2월 OFLC 차관(Office of the Foreign Liquidation Commissioner : 해외청산위원회 차관)이었다. 이 차관은 해외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2천4백9십만 달러 상당의 잉여 시설과 물자를 연리 2.5%, 20년 분할 상환조건의 장기저리로 한국에 할당된 잉여물자였다(한국 국제협력단, 2004. p.36).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시행할 당시에는 자원도 자본도 없고 단지 작은 국토 안에 인구는 많고, 국민은 빈곤의 악순환 연결 고리를 끊지 못하는 가난에 허덕이는 국가였다. 당장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재원의 국내 조달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부득이 대부분의 투자 재원을 외국의 차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68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산업항 축항공사를 수주(9억 3,000만 달러, 당시 정부 예산의 약 30% 정도)했지만, 한국 정부의 보증 대신 바레인 국립은행의 보증서를 받아 사우디아라비아에 제출했다. 당시 차관도입이나 국내기업의 해외건설 등에 필요한 한국 정부의 보증서조차도 다른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는 그런 가난한 국가였다. 그러나 경제가 급속 발전 성장하면서 그에 필요한 해외차관 도입은 점점 원활해지고 그 금액도 점점 증가하여, 1970년대에는 외채 규모가 전 세계 3∼4위 정도까지 오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정부는 보릿고개를 해결하고, 칠흑 같던 동네가 전기로 환해지고, 동네의 꼬불꼬불한 오솔길에 자동차가 달리고, 보일러로 추운 겨울도 걱정 없고, 냉장고와 TV가 보급되는 등 생활의 질이 점점 향상되고, 수출은 점점 늘어나는 등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눈부신 경제발전은 우리 국민에게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면 셋방도 전셋집으로 옭기고, 내 집도 마련하며 잘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았던 그런 시대였던 것 같다.
특히, 한국은 1950년에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더 가난하고, 남한은 1973년까지도 북한의 GDP에도 뒤처지며, 먹고사는 의식주문제도 제대로 해결 못 할 정도로 빈곤했다. 그러나 정부의 통일벼 보급으로 식량문제가 해결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의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결과, 조상대대로 유산처럼 물려받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 춥고 어려운 차디찬 긴 터널을 지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푸르고 평화로운 평원에 당도하여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빛나는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도 꿈과 희망을 품은 그 페달은 계속 질주하길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뉴스파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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